기반암(bedrock)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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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올 예수님(믿음)/믿음

끊임없이 두드리면 열릴 걸세

고지중해 2023. 1. 22.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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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 7을 보면 한마디로 요술 방망이와 같아 무엇이든지 요구만 하면 그냥 우수수 떨어
지는 그런 마술과도 같은 말씀을 들을 수가 있다. 하지만 여기에도 위험한 무엇인가가 숨어
있죠. 예수님을 믿어라 그리하면 너희가 소원하는 것 전부를 얻을 것이다. 너희의 사업도,
너희 자식 대입수능도, 너희의 만수무강도 아무런 문제없을 것 같이 보이시죠.
마태오복음 7의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열릴 것이다. 이런 말씀을 듣고 우리가 원하는 것
을 청하지 않을 욕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느님께 늘 요청합니다. 십
자가형으로 돌아가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서 과감히 청합니다.


우리들의 삶에는 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길이 있고 아니면 하느님 아버지 뜻에 따르는 길
이 있죠. 예수님은 자기 생명까지 내놓고 아버지의 길을 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조금
이라도 생각한다면 우리들이 원하는 것을 청할 수가 없는데 말이죠.
성서 전체를 욕구의 안목에서 보면 요술 방망이일수도 있으나 이런 것을 쳐부수고서 보게 되면
성서는 우주, 인간관계의 존재에 대하여 논술하는 깊이 있는 과학책 입니다. 예수님은 갖가지 은
유로 그 뜻을 풀어 이치를 설명해 주셨죠. 하지만 이런 은유들이 우리들이 가진 욕구의 안목을
통과할 때에 왜곡되어 나타남으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숱하고 많은 이들이 2,000년 전에도 찾아왔는데 그중에 맘이 아픈 이들, 몸이 아픈 이들 아님
죽고 싶은 이들 등의 많은 이들이 찾아왔다. 이들을 향하야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이 청하
여라, 그럼 주실 것이다‘라며 우리들의 청한 사항을 들어주신 것이다. 또한 ’누구든지 받
는다.‘고 했다. 이런 청함과 두드림 사이에는 어떤 의미가 숨어 숨쉬고 있는 것일까?
우리들이 간곡하거나 간절하여 문을 두드리는 기도는 우리 마음을 열고 염원하는 일입니다.
이런 맘은 하느님의 맘으로 흘러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런 것이 기도 아닙니까? 우
리들은 이렇게 원하고 이렇게 찾으며 문을 두드립니다. 그런데 기도하면서 집착이나 애착의
맘이 생기면 맘의 울타리에서 브레이크가 생겨나 스톱하게 됩니다. 빗줄기가 땅에 도달하여
강이 되고 이 강물은 위로 흐르지 않고 늘 아래로 흐릅니다.

우리들이 댐을 막으면 강물은 더 흐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강물은 언제라도 흘
러야 우리 맘에서 신의 맘으로 건너갈 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맘이 하느님과 하나 될 때
에 기도도 통할 수가 있다. 루가11에서 너희들이 생선을 원하는데 왜 뱀을 주겠느냐? 당신
께 청하는 자들께는 성령을 더 잘 주시며, 하느님께서는 마냥 자녀로서만 판단하신다.
그래서 뱀을 주지 않고 생선을 주시나 문제는 우리들 자신이다. 우리들이 스스로 문을 걸어
닫고서 문을 두드리게 하면 문이 부셔질 때까지 두드리더라도 그 문은 꼼짝도 하지 않을 것
입니다.


예수님의 기도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을 기도가 있다. 그것은 겟세마니에서 죽음과 삶의 두
갈래 길에서 기도를 드릴 때입니다. 12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탈출하여 벗어나면 죽음을
피할 수가 있었겠지만,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께 ‘저에게서 이잔을 비켜가게 해 주옵소
서.’라며 엎드려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를 올렸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고 싶지 않으셨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뜻하신 대로 하옵
소서.’라며 예수님의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이루어지게 가만히 놔두신 것이죠. 이렇게 하
여야지 굳게 닫힌 문이 열리면서 소원이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사가 순탄하지 못하여 파고가 큰 파도가 밀려오거나 작은 파도들이 밀려 올 때 우
리들은 기도를 드립니다. 어떻게 기도를 올려야 문을 열어주실까요? 해답은 애착이나 집착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느님 아버지 저를 꼭 일등하게 해 주십시오.’ ‘무슨 일이 생겨도 합격
하게 해 주십시오.’ 라며 자신의 맘을 묶어놓고 기도를 올린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신을 향
하여 올리는 기도가 신께로 가지도 못하고 그만 자기의 독백으로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맘껏 그릴수가 있는 큰 도화지 위에 동그라미를 하나 그리고 나서, 이것이 나의 집착이나
애착이라고 해 봅시다. 집착이 우리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동그라미 속에서 기도를 올린다
고 하면 아무리 힘써도 동그라미 안에서만 맴돌지요. 하지만 나의 애․집착을 없애 버리고서
기도를 올리게 되면 텅 빈 도화지 속에서 무엇이든 나와 소통하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는 ‘하느님 아버지 저의 최선을 다한 시험이 되게 해 주십시오.’ 라고 집착하
지 않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 내용에서 내려놓음이 나타나야 하는 것이죠. 이때에 기
도는 우리를 떠나 ‘신의 초월성’으로 날아들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들이 집착이나
애착을 갖고서 기도를 하는지에 관해 어떻게 알겠느냐? 하시겠지만 정답은 자신들은 다 알
고 있는 것이죠.
성서에서는 신에게 올린 재물들 중에 동물들의 첫째 새끼를 매번 바쳤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아끼고 집착하는 것을 재물로 삼아 하느님께 받친 것이다. 유대인들의 조상인 아브라
함은 그의 자식이 없었으나 하녀인 하갈로부터 이스마엘을 낳았으며, 또 약 100세에 자식을
얻었는데 이름이 이삭이었다.


하느님께서는 재물로 이삭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이슬람교에서는 첫째인 이스마엘을
바치라고 얘기했다고 합니다. 이때에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어찌 이러시나 하시면서 찢어
지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하느님에게 제물인 자식을 받치려고 산으로 데리고
갑니다. 몇 번을 주저했고 망설이기도 했겠지만 칼을 빼드는 순간에 천사가 나타났다.
이렇게 우리들은 집착이나 애착과 멀어지는 순간 ‘신의 초월성’과 직면하게 됩니다. 그
순간은 기도내용이 신에게로 도달된 이후인 것입니다. 우리들의 인생사에서 기도를 올려야
할 때가 얼마나 많겠는가? 하지만 아버지 하느님께서 기도를 그렇게 쉽게 잘 들어주시는
일이 없죠.


루가 11에서 예수님은 일화를 들어 설명해 주신다. ‘한 밤중에 벗을 찾아 빵 3개를 꾸어달
라고 하였다. 친구는 잠이 들었다고 괴롭히지 말며 가라고 했다. 하지만 계속하여 조르면 일
어나 줄 것이다’
우리들은 집착을 갖고서 기도를 올립니다. 동그라미를 그리고서 기도를 올립니다. 서로 통하
지 못하여 들어주지 않는다며 투덜거립니다. 하지만 이런 우리들을 향하여, 우리 눈에 안 보
이나 중간에 포기하지 말고 계속적으로 기도하라고. 모든 걸 내려놓은 채로 끊임없이 두드
리면 열릴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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