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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올 예수님(믿음)/믿음

아빠와 아버지의 차이

고지중해 2023. 1. 22.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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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예루살렘 올리브 산위에서 기도하는 방법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다. 이
게 바로 주기도문이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리셨던 기도로서 주기도문에는 예수님의 맘이
담겨 있다. 우리는 주기도문를 통하여 예수님의 맘을 만날 수 있다. 하느님과 인간이 사이에
서 아주 단순하고 연결된 관계를 나타낸다. 첫 부분에서는 하느님께 당신 구원계획에 대하
여 실현해 달라고 청하고, 다음 부분에서는 인간이 하느님의 계획에 참여하여 살아가도록
필요한 것을 청한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때에 남들에게 자랑하듯 들어내 보이는 기도들 하는 자에게 호되게 꾸
중하시는 구절(마태오6)이 있다. 당시에는 바리사이파인들은 어디로 가더라도 시간이 되면
멈춰 기도를 했다. 이때에는 그들의 대왕이 지나도 소용이 없고 기도를 드린 다음에야 절을
했다고 한다.
심지어 1일에 축복기도 100번 올려야 높은 신앙심이 있는 것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또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기도는 길게 하여야 하늘에 잘 전달되고, 인간의 수명도 그만큼 더 늘
린다고 믿었다. 그리고 축복기도는 올릴 적마다 그 수만큼 믿음의 업적이 쌓인다고 생각했
다.


하지만 요즘에 우리들도 ‘기도를 잘 들인다‘ 혹은 ‘기도를 잘못 들인다‘ 그 잣대가 말
의 매끄러움으로 얘기할 때가 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기도할 때 품위와 드린 량을
중시했듯이, 우리도 기준을 미사여구의 말투와 유창함에 두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이 됩니다.
개신교에서는 100일 동안 새벽기도를 드리는데 여기에 출석에 개근하면 ‘100일 특별기
도’란 문구가 새겨진 성서를 받는데 이건 훈장과 다를 바가 없다. 우리는 이런 성서를 자
랑스럽게 들고 다니면서 ‘아멘’ ‘살롬!’ ‘할렐루야’라고 외친다면 옛날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랑 무엇이 다르겠는가?
예수님은 이런 자를 지칭하여 위선자로 분류하였고, 이들의 기도는 맘속에서 만족감을 얻는
데 어렵다고 얘기하신다. 왜냐하면 기도를 통하여 자아의 옹고집이 돋아나기 때문이다. 그러

나 예수님의 기도는 자아는 작아지고 더 작아져 하느님의 품으로 들어가는 기도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맘이 가난한 이는 하늘나라가 그들 것이다’라고 하셨던 것이다.
하느님의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다. 정의치 못한 사회를 물
리칠 수 있는 가치들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한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과 더불어서만 그 가
치들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가 있고 그렇게 하여 새로운 사회가 솟아나게 할 수 있음을 철저
하게 확신한 사람이다.


우리가 살면서 만족감을 느낄 수도 있지, 어떻게 만족감 없이 살아갈 수가 있단 말인가? 그
렇다. 만족감이 생길 때 마다 PC를 포맷하듯 맘의 셑팅을 하라는 것이다. 만족감이 맘속에
뿌리를 내려 자아성취감을 느끼기 전에 하느님께로 영광을 위탁하라는 얘기인 뜻이다.
자선이나 불우한 이웃을 도울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선행을 세상으로 밖으로 알려야 하나
아니면 안 알려야 하나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들 선행의 관점은 ‘내 맘속에 두어
남느냐? 두지 않아 남지 않느냐?’ 로 해석된다. 남들이 다들 모를 뿐만 아니라 내 맘속에
만족감이 남아 있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오른손이 한 일을 오른손도 모르게 해야 한다는 말은 선행을 한 후 내 맘도 모르고 내 기억
에서 조차도 잃어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마음의 만족감이 셑팅될 때에 하늘나라
에 내 자선이 축적되어 나간다는 것이다. 우리들이 올리는 기도도 마찬가지다. ‘골방으로
가 문 닫고, 보이지 않는 아버지께 기도를 올려야 보답해 주실 것이다(마태오6).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회당이나 광장에서 기도를 했는데 예수님은 왜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골
방에서 기도를 하라는 것일까? ’나의 맘속 더 깊은 곳에 닻을 내려 정박하고 조용히 기
도를 올려라’는 뜻이다. 여기서 ‘문 닫고’는 외부세계와는 단절된, 봉쇄된 기도를 올리라
는 얘기로 보면 될 것이다.


그럼 보이지 않으시는 아버지는 어디에 계시는 걸까? 해답은 내 맘속이다. 그렇다, 우리들
의 내면에는 ‘신의 초월성’이 있으니 여기에 닻을 내려 정박하라는 것이다. 그래야 기도
소리가 보이지 않으시는 아버지께서 용이하게 듣게 되시고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슨 종교에서도 기도는 똑같이 존재한다. 천주교인의 바라는 기도는 과연 무엇일까? 아니
무엇을 원하고 바라야 하나. 하늘과 땅이 하나 됨에 따라 통해 하늘에 계시는 분과 내가 하
나 되기를 빌어야 한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듯이,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됨을
바라라.
예수님은 기도를 바칠 때에는 아람어를 사용했는데, 아버지 하느님을 지칭할 때 꼭 압바(유
대인들의 아빠)하면서 기도했다. 그런데 우리와는 다르다. 우린 늘 아버지라고만 한다. 왜냐
하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로 양도되어 입양된 입양자식이기 때문이다. 그러
므로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자격이 없고 아빠라고 불러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느님을 아빠라고 불렀던 예수님은 하느님의 외아들이었고 하느님과의
거리감이 매우 가까웠으며, 예수님 내면에 있는 ‘신의 초월성’과 하나 될 수 있었기 때문
에 하느님의 호칭을 아빠라고 부를 수가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과 거리감 때문에 또
한 거룩하시고 엄중하신 분이어서 늘 기도를 올려야 하는 대상이기 때문에 감히 아빠라고
칭할 수가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며 기도를 올리는 예수님이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으리라
생각된다. 실제로도 예수님을 죽인 사유로 첫째 안식일을 어겼고 둘째가 하느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불렀기 때문이었다(요한복음5/18).


그러나 예수님께서 12제자들에게 기도에 관해 말씀하실 때에 예수님 자신의 기도문을 변경
시키지 않고 그대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 즉 ‘압바’라는 글귀가 들어간 주기도문을
그대로 제자들에게 전하여 주신 것이다. 만약 ‘압바’라는 말씀을 예수님에게만 부를 수가
있었다면 다르게 가르쳐 주셨을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제자 자신들에게도 ‘압바’는 그대로의 ‘압바’였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을 지으실 때에 하느님께서는 ‘신의 초월성’과 함께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의
초월성’은 우리 내면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피가 우리
맘속 내면으로도 흐른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든 이의 ‘압바’가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주기도문을 하느님께 올릴 때에는 작은 방으로 가 문짝을 걸어 잠
그고서 기도하라고 하는데, 이 말씀은 자기 맘속 내면을 다하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느
님 뜻은 하느님의 계시는 곳이 하느님 나라이고 땅은 지상에 있는 나의 맘속(내면) 세계이
어서 이것 둘이 하나 되기 위해 예수님이 오신 것이다.
맘이 가난한 이들은 누구인가? 애착하거나 집착하는 맘이 없는 자일 것이다. 이런 맘의 상
태가 되어야 하늘나라가 우리들의 것이다. 나의 내면의 품성과 하느님의 속성이 하나로 통
일이 되어야 땅이 하늘과 같이 될 것이다.


우리는 숨을 쉬고 하루도 빠짐없이 세끼를 먹는 기원의 모든 것들이 하느님 속하고 그분으
로부터 파생되어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일상의 모든 것들을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나를 위탁하면 난 더욱 가난해지며 그 만큼 하느님의 뜻이 땅으로 오시게 하는 방안이 되는
것이다.
우리들에게 잘못하는 이들을 우리들이 용서하게 되면 이후에는 하느님께서 행위를 하신다. 원래
용서란 우리들의 맘에 존재해 있는 앙심을 부셔버리는 일이다. 앙심을 부셔 내리면 맘은 아무것
도 없는 상태인 백지 상태로 되겠지요. 이렇게 백지상태로 되어야 하느님이 오시기 때문에 우리
들 각자들이 하느님의 출입을 틀어막고 있는 거죠.


아버지의 이름이 빛나게 하려면 내 이름이 아버지의 성함에 가리지 않을 때이다. 신부가 교
단에서 강연 후 명강의에는 박수가 터져 나오는데 신부가 받을 박수가 아니므로 뒤돌아서서
십자가를 향해 고개를 숙여야 한다. 그래야 아버지의 성함을 가리지 않지 않겠는가.
하느님의 나라와 나와의 관계에서 아무런 벽이 없어 아버지 속에 내가 거할 수가 있어야 한
다. 최종의 벽인 ‘나의 뜻’ 일수도 있으니 ‘아버지 뜻대로’ 라고 기도한다. ‘아버지 뜻
대로’의 지름길은 ‘산상수훈’ 속에 담겨져 있다. 나와 하늘이 서로 소통해야 하나 두터
운 벽이 있다. 그것이 하늘 벽이다. ‘주님의 기도’는 그 벽체를 뚫어 하늘과 우리를 연결
시킨다. 주님이 일종의 ‘노하우’를 알려주신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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