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기원전 약1750년경) 바빌로니아에서 선포한 함무라비법전에는 ‘다른 이의 눈을 해한 자
는 자기의 눈알도 부셔야 한다.’ ‘부모님을 때린 자식은 그의 손을 못 쓰게 한다.’로 기술되
어 있다. 이렇게 이에 대응하는 이, 눈에 대응하여 눈으로 기술하고 있다.
예수님 당시에 갈릴리 호수 주변으로 많은 성곽들이 있었고, 이들 성을 뺏기 위해 무기를
들고 싸우기 일 수였다. 이 과정에서 신체의 일부분이나 생명을 잃기도 했다. 그러므로 서로
원수가 굉장히 많았나 봅니다. 나의 남편이나, 나의 자식들을 죽인 원한 맺힌 원수가 많았다
는 얘기죠.
그러나 예수님은 달리 얘기 하셨다. “아버지의 자녀가 되려하면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주는 이
들께 기도하라.”(마태오5) 이런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과연 황당하게 느끼지 않았을까?
원수를 죽여 없애도 화가 안 풀릴 것 같은데 말이죠.
로마의 군대는 예루살렘을 징벌코자 쳐들어 왔지만 높은 산으로 형성된 예루살렘의 성벽은
무척이나 허물기가 어려웠겠지요. 그래서 로마의 군대는 유대인들이 쉬는 안식일까지 기다
렸다가 안식일에 성벽을 허물어트린다. 결국 성이 함락된 유대인들은 약 2만 명이나 죽었다
(기원전 63년). 이런 전쟁에 따라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에 대한 증오가 오죽했을까?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여라. 이렇게 해야 아버지의 자녀가 된다.’ 는
말씀에 대해 유대인들은 각자 스스로의 원수들에 대해 생각이 났을 것이다. 누군 로마제
국의 군대 총사령관이고, 누군 자기의 이웃사람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가 없다는 데 여기서 아버지 자녀란 아버지와 같은 ‘신
의 초월성’을 지닌 사람들이다.
이 말씀을 다시 써 보면 ‘원수를 사랑하면 아버지의 자녀가 된다.’ 라고 풀이 할 수 있다.
당시에 유대인들에게는 율법만을 지키면 천국과 같이한다는 생각을 바꾸라는 얘기이다. 요
즘도 하루에 수십 번씩 거짓으로 얘기하며 물건을 팔고, 주위에 불우한 사람들께 무관심하
게 넘어가는 우리들에게 가능한 일이겠는가?
‘아버지의 자녀’란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천m의 높은 산처럼 여기고 아예 오르려고 하지
않고 산만 높다고 얘기하는 경우와 같다. 이렇듯이 우리는 첫 발자국을 띠지 않고 그냥
‘왜 사랑하여야 하지?’라고 오르려고 하지 않는다. ‘너희들도 완전한 자이어야 한다.’
(마태오5/48) 한신 말씀이 해답이다.
여기서 주안점은 ‘완전한 자’이다. 예수님의 바램은 ‘아버지처럼 완전해져라‘는 것이다.
이래서 우리는 첫 발자국을 띨 수가 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첫 발자국이 아니고 완전
해지는 게 우선 발자국이다.
이런 완전함이란 “아버지의 품성을 닮아 완전케 되라”란 말이다. 우리들의 맘은 늘 선은
담아 두고 악은 쏟는 습성에 젖어있다. 그러나 우리 하느님의 밝은 빛은 선한이나 악한이나
똑같이 비춘다. 하느님은 왜 선과 악에 관계없이 똑같이 베풀고 계실까? 그렇죠. 우리들도
완전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죠.
선과 악을 구분하여 쪼개어진 절반의 맘이 아니고 하나일 때에 우리는 ‘신의 초월성’에
가까워진다. 우리들의 왜 원수가 발생하는 것일까? 나의 원수들은 나의 잣대인 사고로 인해
발생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원수를 사랑하면 선과 악을 구분하던 사고는 사라지
고 선과 악의 생성이전으로 회귀한다. 이것이 완전함으로 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고 말씀하신 사유입니다.
지옥은 하느님 나라의 안에 있나? 아님 밖에 있나? 하느님은 천국에만 햇빛을 비추고 지옥
에서는 비추지 않을까? 하느님이 큰 분일까? 아님 작은 분일까? 그래서 원수도 하느님은
사랑하고 계십니다.
선과 악을 구분하여 반쪽만을 갖고 사는 우리들은 하느님을 반쪽내고 있지는 않을까? 이렇
게 작은 하느님을 지어내어 놓고 내 그릇과 같다며 좋아하고 즐기고는 있지 않을까? 우리
들의 맘이 더 커져 완전해져야 하며, 이러기 위해서는 원수를 사랑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계명’과 ‘제자의 순종’은 그렇게 딱딱한 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친밀하고
끈끈한 관계로 이어질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
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처럼 계명에 순종함으로서 ‘나를 사랑하는 자’가
된 사람은 ‘아버지께 사랑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타나리라.’고 사
랑관계가 더욱 깊어진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요한복음14/21-24). 즉 제자는 예수님 말
씀을 순종함으로서 예수님을 진정 사랑하고 있음을 나타내게 되며 그 관계가 더욱 가깝
게 발전한다는 뜻이 아닌가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마태오 22/37~39)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죠. 그래서 주일에는 성당으로
가서 하느님께 기도하고, 불우한 이웃을 위해 선금을 내기도 합니다. 맘속으로는 뿌듯하죠.
‘주말에 가장 큰 계명을 지켰구나.’ 라며.
‘다함’에 밑줄 쳐 볼 때 ‘네 마음, 네 목숨과 네 뜻을 다함’ 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데 ‘왕
도‘라는 겁니다. 이런 다함의 순간에는 자기와 자아는 없겠죠. 이 세상을 좌지우지하던 당신은
없어지고 자아도 남아있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려고 하지만은 내 마음, 내 목숨
과 내 뜻을 안고서는 하느님을 절대로 사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둘째가는 계명도 마찬가지죠. ‘네 몸과 같이’란
부분에 밑줄치고, “이웃을 사랑하라” 대신에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
을까요. 다함의 순간에는 내 이웃이나 내 몸이나 내 뜻이 똑같이 되어 이웃을 사랑할 수 있
게 되죠.
그러니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1, 2계명은
다 같은 얘기인 것이죠. 이처럼 내 이웃이 내 몸이 되는 내 삶이 있었는가? 라는 물음에 초
라해진 내 모습과 함께 ‘아니오‘라는 대답만 할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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