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그 날은 준비일이었고 이튿날 안식일은 큰 축일이었으므로,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시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 않게 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시신을 치우게 하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군사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예수님께 가서는 이미 숨지신 것을 보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이는 직접 본 사람이 증언하는 것이므로 그의 증언은 참되다. 그리고 그는 여러분이 믿도록 자기가 진실을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의 뼈가 하나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하신 성경 말씀[1]이 이루어지려고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이다. 또 다른 성경 구절은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볼 것이다.”하고 말한다.[2] 요한 복음서 19장 31~37절
2. 유래
요한 복음서 19장 34절은 예수의 시신을 창으로 찌른 사실을 언급하고 그 경위까지 자세히 설명한다. 십자가형 항목에도 서술되었듯이, 십자가형을 당하는 사람의 주된 사인은 질식사이다. 양팔이 고정되어 횡격막이 흉부를 압박해 강제로 들숨만 반복되는데 숨을 내쉬기 위해서는 역시 고정된 다리에 힘을 가해 무릎을 억지로 펴야 한다. 따라서 다리를 부러뜨리면 더 이상 무릎을 펼 수 없어 곧 사망(질식사)에 이른다.
유다인들은 안식일까지 시체를 십자가 위에 두지 않기 위해 신속히 예수와 다른 두 죄수를 처리해 달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했고, 이에 군사들이 예수와 함께 못박힌 2명의 다리를 부러뜨려 강제로 죽였으나[3], 그때 이미 예수는 사망한 상태였으므로 진짜 죽었는지 확인하고자 창으로 옆구리만 찔러본 것이다.
이 대목은 신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의가 있다. 구약에서 파스카 축제 때 예수의 예표가 되는 희생제물인 어린양의 뼈를 부러뜨리지 않고 먹는 전통과 연결되어 예수가 자기 자신을 제물 삼아 성부에게 바침으로써 온 인류를 구원했다는 것을 뜻하고, 예수가 단순히 죽음을 위장했거나 가사 상태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4] 부활 이전에 참으로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롱기누스 항목에 설명되었듯이 가톨릭 성전에서는 위와 같이 예수를 찌른 병사의 이름을 롱기누스(론지노)라고 하며 시력을 잃었다가[5], 창에 찔린 예수의 옆구리에서 쏟아져 흐르는 피를 눈에 바르자 다시 시력을 찾을 수 있었고 이에 크게 감동하여 기독교인이 되어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 성 론지노로 공경받는다.
이에 하느님의 피를 묻혔다 하여 성창(聖槍)이라 부르거나, 카롤루스 대제(샤를마뉴)가 소지했다거나[6] 아서 왕 전설에도 '어부왕의 창'으로 등장하거나 하는 등 여러모로 유서깊은 떡밥이다. 나중에는 켈트 신화나 게르만 신화에 등장하는 (게 불그, 궁니르 등등) 신의 창의 이미지와 결합하여 주변 일대를 완전히 가루로 만들거나 초토화시키는 파괴력과 성스러운 치유 능력을 가진 무기로 통하기도 했다.
성배와 함께 기독교 세계에서 호사가들에 의하여 오랫동안 회자된 유물 중 하나로, 창작물에 차용될 때에는 '신을 죽인 창', '운명의 창'(Spear of Destiny)이라는 이름으로 종종 불린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위에도 말했듯 '죽은 걸 확인한 데에 쓰인 창'이므로 '신을 죽인 창'이라는 호칭은 부정확하다.
(비엔나 박물관에 안치된 롱기누스의 창의 모습)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있는 호프부르크(Hofburg)박물관에 전시중인 롱기누스의 창
롱기누스의 창(Lance of Longinus)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있을 때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롱기누스(Longinus)라는 로마병사가 창으로 예수의 심장을 찔렀으나 빗나가 옆구리를 찔러 피가 흘러나와 예수의 피가 묻은 신성한 창이라고 한다. 롱기누스는 창으로 예수를 찌른 순간 눈이 멀었으나 창에 흐르는 피로 눈을 씻으니 회복되어 그후 예수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이 창은 롱기누스집안에서 전해져오다가 그 후손이 로마에서 밀라노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했던 콘스탄티누스황제에게 바친다. 그는 이 창이 하느님의 뜻으로 인도해 준다고 믿어서 부적처럼 몸에 지녔다고 한다. 그후 이 창은 칼 대제의 할아버지인 프랑크왕국의 궁재(왕실의 군대와 재정을 총괄하던 직) 칼 마르텔이 소유하게 된다. 그는 피레네산맥을 넘어 유럽에 침입한 이슬람의 대군을 732년에 프랑크의 프와티에(Poitiers)평원으로 끌어들인뒤 궁수부대를 매복시켰다가 기습전멸시킴으로써 유럽을 이슬람의 위협으로부터 구한다. 그는 항상 전투시에 이창을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그후 그의 손자 샤를마뉴 대제(칼 대제)에게 전해졌는데 그는 47번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모두 승리하게 되며 그것이 이 창 때문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연히 이 창을 떨어뜨린 직후에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서기 900년 초 이`운명의 창`은 독일 작센(Saxon)왕가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된다. 마자르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했을 때도 이를 지니고 있던 하인리히 1세(919~936)는 작센 왕가의 지배자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그의 아들 오토 대제(AD 955~963)에게 창을 물려주었다. 교황 요한 12세(AD955~963)는 오토 대제에게 세례를 주면서 이 창을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토 대제는 이 창을 지니고 `렉 전투`(The Battle of Leck)에서 몽고족을 격파했다. 그 후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바바로사를 비롯 1.000년 동안 45명의 제왕이 이 숙명의 창을 소유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역시 롱기누스의 창에 대한 이야기를 믿었다. 그는 당시 사라진 롱기누스의 창을 찾기 위해 전 유럽을 뒤지고 돌아다녔으나 끝내 찾지는 못했다.
그후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학자 발터 슈타인(Walter Steinmeier)으로부터 '이 신성한 창을 소유하는 사람은 이 세계의 통치자가 된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당시 비엔나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호프브르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던 창에 관심을 갖는다. 그 뒤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1938년 4월 비엔나로 입성한뒤 히틀러는 첫 공식 일정으로 비엔나의 호프부르그 궁전에 도착하여 보물관에 들러 유리 상자속에 모셔진 성스러운 창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번쩍 들고 나왔다. 그 이후 독일군이 전투마다 승리하며 파죽지세로 진군하여 유럽 전역을 거의 석권한다. 히틀러가 죽고 독일이 패전한 뒤에 잠시 미국으로 건너가 있다가 다시 비엔나의 호프부르크 박물관에 반환되어 현재까지 전시하고 있다.
그런데 호프브르크 박물관에서 지금 전시하고 있는 창이 진품인지를 증명하기 위해 과학자와 고고학자, 그리고 디스커버리 채널이 나서서 이 창의 금속 연대를 측정하는 방식으로 창이 제작된 정확한 시기를 알아냈는데 결정적으로 이 금속이 만들어진 시기는 대략 7세기 경으로 예수의 몸을 찌른 창은 절대 아닌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렇다면 진품은 정말 있었을까?
일본 가쿠엔사의 월간 'MU'에 나온 기사를 칼럼니스트인 최호씨가 번역 및 정리한 자료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히틀러가 연합군에 항복하기 직전인 1945년 초. 독일 U보트 한 척이 아르헨티나에서 400km 떨어진 남극의 한 협곡에 정박했다. 이 배엔 히틀러의 특명을 받은 해군 결사대 58명이 타고 있었다. 이들은 히틀러가 끔찍이 아끼던 성스러운 물건 하나를 비밀리에 싣고와 남극의 얼음 동굴에 숨겼다고 한다. 바로 롱기누스의 창이었다. 이런 이유때문에 호프부르크 박물관에 전시중인 창을 히틀러 추종자들은 진품이 아니라고 믿고 있다. 실제로 1974년 '성창 기사단'이란 모임이 독일 뮌헨에서 비밀리 열렸다고 한다. 이들은 남극에 숨겨져있는 롱기누스의 창을 회수하기 위한 별동대를 조직했다. '미션 앤타티카(남극 작전)'라는 암호명이었고, 히틀러 맹신자였던 하르트만을 단장으로 4명의 결사대가 조직됐다. 이들은 뮌헨을 출발해 마드리드를 거쳐 상 파울로로 날아가 그곳에서 수륙양용 비행정을 타고 남극 호프만 산맥 협곡 동굴에 도착했다. 멀고 험난한 길이었지만 고생한 보람이 있었을까. 남극 동굴속 강철문이 35년만에 열리면서 빨간 가죽 손잡이가 달린 청동색 창이 신비한 옛 모습을 다시 드러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진품' 역시 행방이 묘연하다. 전시중인 창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히틀러가 정말 남극에 숨겼는지, 그 숨긴 창을 찾았는지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3. 십자군과 창
아무래도 가장 유명한 떡밥은 십자군 전쟁 당시 안티오키아를 함락시킨 십자군의 종군 수도사 피에르가 안티오키아 대성당에서 롱기누스의 창을 찾았다는 것인데, 당시 오랜 포위전으로 인하여 안티오키아에 입성하고도 굶주림에 허덕이던 중 모술의 아타베그인 카르부카가 아랍 에미르들을 규합하여 안티오키아로 쳐들어오자 이 성창만 믿고 닥돌을 감행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놀랍게도 아랍 군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어 마구잡이로 퇴각하기 시작하여 십자군이 대승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애초에 독단적이고 자기중심적이었던 카르부카를 싫어했던 아랍의 에미르들이 '그래 너 엿 좀 먹어봐라'하면서 퇴각했다는 것이 훨씬 더 신빙성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당대의 이슬람 측 증언과 십자군측 증언을 종합해보면 케르부가의 전술적 실수도 크게 한 몫 한 것으로 보인다. 십자군이 안티오키아 성에서 분견대별로 나올 때 포위 후 각개격파하거나 그도 아니면 십자군이 자신의 진영까지 도달했을 때 포위섬멸하는 선택지가 있었지만 케르부가는 성문 앞에서 진형을 구성하고 기다리고 있는 십자군들에게 자신의 병력을 들이받았다.
십자군 대형이 허물어지지 않자 당황한 전위가 퇴각하려고 했지만 뒤에서 몰려든 후위병력 탓에 케르부가측 진형은 허물어졌고, 여기에 케르부가의 개인적인 인격적 결함에 불만을 품은 에미르들이 협조를 거부하는 것이 겹쳤다. 결국 그대로 전 병력이 퇴각하는 병크를 저질렀다. 이상은 토머스 애스브리지의 '1차 십자군'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다.
게다가 이 롱기누스의 창에 대한 시비가 걸렸는데, 당시 안티오키아를 함락하면 공작 직위를 받기로 했던 보에몽은 롱기누스의 창이 가짜라고 주장하였고, 안티오키아는 십자군 모두의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맹세한대로 동로마 황제 알렉시우스 1세의 것이라고 주장했던 레몽 드 생질은 롱기누스의 창이 진짜라고 주장하였다.
이건 사실 둘의 이해관계로 인해 발생한 갈등인데, 성창이 진짜라고 인정할 경우 안티오키아 함락은 십자군의 공이 아닌 전적으로 성창의 신성함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므로 보에몽의 안티오키아 공작 작위는 물건너가게 된다. 즉 알렉시오스와 약속한 대로 안티오키아를 동로마에 반환해야 하는 것. 반대로 성창이 가짜라고 인정할 경우 안티오키아를 함락시킨 것은 성창의 신성함이 아닌 십자군의 전과가 되므로 보에몽에게 안티오키아가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결국 중세의 재판방식인 신명재판 중 하나인 불의 재판[8]을 시행하기로 하는데, 당연히 불 위에서 걸을 사람은 성창을 발견한 수사 피에르였다. 하지만 레몽의 기대와는 달리 피에르는 불을 걷다가 쓰러져 중태에 빠져 수일 내에 사망하였고, 이에 따라 레몽의 헤게모니는 급 추락, 보에몽이 안티오키아를 독차지하게 되고 그때부터 레몽의 지위는 하락하여 나중에 예루살렘의 왕으로 추대받기는 했지만 워낙 정도를 걷고 또 나이 지긋한 노영주로서 위세를 부려 적이 많았고, 또 스스로가 저지른 여러가지 불찰도 있었기에 물러나서 트리폴리를 공략하지만...공성을 준비하다가 사망한다.
3.1. 히틀러와 창
소유자에게 절대적인 승리의 권능을 부여한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덕택에 오스트리아의 호프부르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던 롱기누스의 창이라고 알려져 있던 창날을 아돌프 히틀러가 가지고 있었다가 베를린 함락 직전에 미군이 탈환[9]해서 지금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보물로 등재되어 현재도 호프부르크 박물관에 있다고 한다. 하지만 형광 엑스선 검사로 고대 로마 시대의 철제 창과 10세기의 철제 창, 오스트리아의 롱기누스의 창을 비교한 결과 고대 로마시대의 창 보다는 10세기의 창과 비슷한 결과를 보였다. 따라서 10세기~11세기의 물건이라 창은 진품은 아니다. 다만, 창에 박혀있는 못이 7세기 이전 물건이라고 하고, 그 못이 롱기누스의 창의 부품이라는 주장도 있다.
본 문서의 사진이 현재 오스트리아에 보관되어 있는 성유물인데, 고대-중세 무구에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현재의 창날 모양이 꽤나 이상하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왼쪽 파편을 양쪽에서 둘러싸고 있는 조각을 제거하고 오른쪽 파편과 이어붙이면 전형적인 중세(?) 창날의 모양이 나온다. 나머지 조각들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최근의 연구 결과, 카롤루스 대제가 성정을 소유했던 당시 성창을 만들기 위해 옛날 창 사이에 못을 넣고, 함께 은제 철사로 감싸 금판을 씌우고 '주를 못 박은 못과 창'이라고 쓴 후 그 위작을 성창이라 불렀다고 한다.
따라서 창날은 형광 액스선 검사 결과 10~11세기 창이라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설사 있다고 해도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아무래도 이미 부식되고 조각나고 하면서 이미 망가졌거나 분해되어서 조그만 파편 조각이나 부스러기 정도 빼고는 분해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카롤루스 대제는 9세기 초에 이미 사망한 인물이기 때문에, 10~11세기의 창은 그가 '만든' 것일 수도 없다.
일부에서는 친위대 장관 하인리히 힘러가 남미를 거쳐 남극으로 운반했다는 설, 프리메이슨이 미국으로 들고 가서 백악관의 주춧돌로 써먹었다는 설 등등 수많은 음모론들이 나돌아 이런저런 미디어물에 떡밥을 제공한다.
3.2 교황청의 보관
공식적으로는 현재 교황청이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작은 기도실에 예수가 십자가의 길을 갈 때 성녀 베로니카가 예수의 얼굴을 닦은 수건, 예수가 못박힌 성십자가의 나무조각과 함께 보관되어 있다고 하며, 성 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성 론지노(롱기누스)의 성상에는 교황청이 롱기누스의 창을 보관하게 된 경위가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을 받치는 북동쪽 기둥의 벽감에 있는 성 론지노의 5 m 높이 성상. 벽감 윗부분과 조각상 기단부에 각각 라틴어 명문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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