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교를 한마디로 축약하면 율법의 신앙이다. 하느님과의 약속을 율법으로 기재하여 이것
을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이유가 민족을 구원하시는 하느님과의 언약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지혜를 물려주기 위해 수많은 장애의 벽과 싸워야 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유대 율법’이다. 이런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공격을 가했으나 “내
가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율법학자들보다 더 의롭지 못하면 천국으로 갈수 없다’라고 하신
다. 이런 말씀은 율법을 지킴으로서 하느님으로부터 구원받기를 기대하는 유대사회에 대하
여 정면으로 반대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유대사회가 어떻게 율법을 지키느냐’가 아니고 ‘유대사회가 율법을 왜 지키느
냐’의 측면에서 바라보았다. 세월이 흐르다 보면 주체와 객체가 서로 바뀌어 목적과 수단을
혼돈하게 된다. 이렇게 지금 뭣을 향해 다가가는지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율법을 잘 지키는지
에 대해서 만을 따진다. 우리들의 천주교도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함이나, 주일을 지키고, 헌
금을 하고, 교무금을 내고, 성당을 섬김으로서 이것이 곧 하늘나라인 줄로 착각하는데 수단과
목적이 혼돈하기 때문이다.
맨 처음에는 하느님께 제사를 올리기 위해 장작더미 위에서 불타는 가축의 몸체를 보면서
유대인들은 자신이 그 위에 누워있는 간접적인 죽음의 체험을 하지는 않았을까?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흘러 이제 제사는 격식에 지나지 않는 즉 제사는 곧 ‘죄사함’이라는 의미
로 변환되어 주체과 객체가 뒤바뀔수 있다는 것이다.
제2의 모세가 나타나 로마제국의 지배에서 해방시켜줄 수 있는 메시아에 대한 열망이 많이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 메시아가 예수님으로 알고 로마의 식민지에서 해방을 고대했을
것으로 볼 수도 있죠.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무기력하고 무능력적이기 짝이 없을 지경이
었습니다.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과연 어떻게 받아들
였을까?
모세가 지냈던 제사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올리던 제사로 가축을
잡아 제단에 피를 뿌리고 내장은 제단 위에서 태웠다. 예수님의 죽음은 동물이 아니라 몸소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죄 사함을 위해 제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사리분별력이 있는 사람들은 믿을 수가 있다. 도대체 2000년 전에
죽으신 예수님과 나의 죄와의 관계를 알지를 못하겠다는 것이다. 왜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죄를 사해주는가? 참 ‘미스테리’한 이야기라고 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겠다. 그리고 나는
주일에 성당에 나가고 매월 교무금을 내며 예수님의 말씀도 잘 따르고 있고,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이미 죄를 사함을 받았다고 믿는 자이다. 그렇다고 하늘나라의
티켓도 따 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겠는가?
제단에 장작 위에서 불타고 있는 시신이 가축이 아니고 내라면 과연 어떨까? 이렇게 나의
대한 반성과 아울러 자신의 가슴에도 불이 타올라야 한다. 그래야 자아가 완전히 연소하고
난 뒤에 신의 초월성이 나타난다. 즉 나의 마차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수레를 떼려야 옳은지
아니면 말을 떼려야 옳은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들이 쉽게 생각하는 십자가의 죽음은 그야말로 고통의 극치이다. 큰 못이 손에 박히고
발목을 관통하여 나무에 박히고 그 후에 십자가는 세워지며 자기 무게에 의해 육체는 아래
로 늘어진다. 손과 발목에 박힌 큰 대못과 뼈들에 의해 지탱하는데, 이러한 죽임의 고통은
정말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통증이다. 이런 엄청난 고통 속에서 ‘죽여 주십시오‘ 목매
이게 애원하나 죽을 수도 없다.
이러한 십자가형을 볼 때에 ‘믿음은 구원이다’ 이처럼 간단할 수가 있을까요. 우리들이
알고 있는 많은 성인들은 왜 그렇게 투쟁하며 믿음을 지켜 왔을까요. 이런 입장에서 ‘믿
음’에 관한 개념은 과연 무엇일까요?
믿음은 곧 신뢰를 기반으로 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안에 거하듯 예수님 안에 내가 거
하여야 합니다.”처럼 나와 예수님이 하나가 되어야 하듯이 바로 ‘신의 초월성’을 관통해
야만 한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따라야 하죠. 이러지 못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로께서는 예수님과 함께 못 박혔다
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하는 즉 믿음에 관한 열쇠가 바로 ‘자기의 십자가’
입니다.
목사가 입으로 ‘쉬’하고 불면 성령이 임하거나 손바닥으로 등을 때리면 소위 안수기도라
는 것을 하면 순간 성령이 들어온다는 어처구니없는 쇼를 하는 것을 봅니다. 성령님은 삼위
일체의 하느님이신데 그런 성령님을 무슨 귀신 부르듯이 임하게 해 준다고 하니 이것은 소
위 ‘신성모독’의 죄입니다. 성령은 결코 목사가 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부께서 보내어
주시는 것으로 원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불가항력적인 선택에 의해 친히 내 속에 오심으로
서 그 결과 우리와 함께 있게 되시는 것이다.
“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고 할 때의 ‘거함’의 열쇠가 ‘자기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늘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라오는 이에게 ‘넌 언제나 사랑
스런 나의 제자이구나!’하고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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