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체 지구물리학자들은 우주의 시점을 ‘빅뱅’이라고 하는 것에 반해 성서에서는 ‘태초’
라고 한다. 그럼 빅뱅 이전에는 무엇이 존재했냐? 심각한 얘기는 바로 창조론과 진화론의
바로 끝 질문이자 아주 흥미로운 얘기이다. 결론적으로 빅뱅이전에도 별은 계속하여 빅뱅을
준비하는 과정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궁색해진 변명이나 분명한 것은 무엇인가
우주에 뿌려진 운석체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현재 지질학자의 이론은 빅뱅은 별이 수명을 다하면 발생하고, 또 그 빅뱅 이전에 또 다른 빅
뱅이 있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는 석질운석에서 암모니아(NH3)기가 출현함으로서 지구상에 생물
의 존재와 태양계의 진화를 근래에 알게 된 사실이다. 태양계가 탄생할 당시의 최초물질을 그대로
보존한 운석으로 여기에 존재하는 암모니아기는 자연계에서는 생성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두가지 입장은 충돌하나 가만히 살펴보면 성서는 ‘빅뱅 있기 전’을 의미하고, 과학
자에게는 ‘빅뱅 있은 후’를 말함으로 다소 해결될 수도 있어 보인다.
요한복음 13/23의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표현과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 옆에서 기대어
앉을 정도의 친근감, 만찬장에서 팔아넘기려는 자가 누구인지 베드로조차도 예수님께 바로
묻지 못하고 고개 짓 하는 분이 바로 사도 요한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집필
자로 복음서에서 가장 어리고 사랑하는 애제자로 보는 것 같습니다.
왜 이렇게 예수님은 사도 요한을 아끼고 사랑한 걸까? 그 답은 요한복음의 ‘빛나는 영성
의 영롱함’ 때문일 것이다. 요한의 안목에는 이런 각별함이 녹아있다. (요한복음 1) : 이
세상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 생겨났으며, 그 원천은 빛이었다. 어두움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
다.
12사도 중에서 약 90세까지 사시다가 그리스 밧모섬에 유배당하시고 18개월이나 살았으며
제 명에 죽은 이가 사도요한이었다. 여기 밧모섬에서 성서 복음서의 결정체인 요한복음과
계시록을 집필한다. 밧모섬은 그리 높지 않은 조그만 한 섬으로 처량한 유배지이었다. 요한
복음은 창세기와 연계하여 우주적인 실체, 신의 초월성으로 시작하고 주인공으로서의 예수
님에 대하여 영성이 녹아있어 타 복음서와는 달리 ‘특별하다’ 할 것이다.
요한복음1/5에서 ‘빛은 여전히 어둠을 비치고 있었지만 어두움은 깨닫지 못했다‘고 말씀
하였다. 빛은 과연 어디에서 존재하는 실체일까? 그래, 바로 내안에 빛이 있으나 내 안목에
는 보이질 않는다. 이유는 내 눈은 어두움에 숙달하여 빛에는 낯설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
서 살았던 수많은 유대인들만 예수님을 알지 못한게 아니고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도
‘나의 마음속의 빛’을 모르고 살아갈지 모른다.
이렇게 저렇게 하여 예수님이 오셨다. 이걸 요한복음1/14에서 ‘말씀이 사람으로 되시어 우
리들 가운데서 계셨다’로 쓰였고 어두움 속에서 빛을 찾아내는 법들이 예수님의 어록일 것
이다. 이러한 말씀들로 하여 “나의 맘속에 어두움은 빛으로 변화할 것이다“고 얘기할 수
가 있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말씀을 살펴보면 예수님은 온갖 우주들이 생겨나기 전부터 존재하였으며
‘나 보다 앞선 분’은 빅뱅이전의 우주보다 앞선 분이라는 것이다. 빅뱅이전을 일반 과학
자들은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나 성서에서 가정은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도 있다. 100m수
영 시합을 하는 레인 위에 서 있는 순간이 빅뱅의 순간이고 100m수영시합을 하는 실내체
육관이 빅뱅이전의 시간들이 다는 것이다.
빅뱅이전의 바탕이 100m수영 코스의 수영체육관임으로 출발선에도 10m, 20m, 30m 등 어
디에도 모든 시공간에도 어디에도 다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번의 100m시합이 끝이
나면 1회의 빅뱅이 이루어진 것이고 그 다음 시합은 다음 회의 빅뱅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
느님께서는 어떤 곳에도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
요한복음1/3의 말씀을 풀이하면 ‘어떤 수영체육관도 수영시합 레인 때문에 생겨났으며
레인이 없는 수영체육관은 없다’고 표현할 수도 있는 거죠. 그러면 이런 수영체육관과 같
은 즉 모든 시공간에서도 계시는 우리들의 하느님은 어디에서 찾아야만 하는 걸까? 바로
평상시일 것이다. 빅뱅이전의 시간으로 되돌려놓아야만 만날 수가 있을 것 같았던 우리들
의 당초인 ‘태초’가 현재인 ‘여기에’라는 요한복음에서 말씀하신다.
인도 수학에서는 ‘0’가 ‘빈 공간으로 있음’ ‘형태가 없음’을 의미한다. 이게 중국으
로 가서 ‘공(空)’으로 해석되어졌고 아무것도 없는 묘한 실체이다. 그래서 1속에도 존재
하고 5속에도 존재하고 7속에도 존재하며 우리들의 어떤 곳에도 들어있다는 것이다.
어두움이 있는 곳에 빛이 있으나 그 어두움이 알아채지 못하듯이. 밤하늘에 빛나는 별빛 속
에도 ‘0’는 상존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두움 속에 빛이 있으므로 너희 속에 천
국이 있다’
우리가 좇는 것과 찾는 것은 손과 눈에 잘 잡히는 것들입니다. 우리들의 인생방식에서 보면
이것들을 쌓고, 쌓고 또 쌓기를 거듭하여 축적을 합니다. 타이어가 빈 공간으로 인해 바퀴가
굴러가고, 그 빈방에서 내가 잠을 이루고, 광주리에 말릴 고추가 담깁니다. 이렇듯 물체가
있는 공간을 보지 말고 공간(공)속에서 물체를 보라는 것이죠.
사도 바울로는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
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셨다.(고린도전서 2/9)’
라고 말씀하시고 그걸 ‘하느님의 지혜’라고 하셨죠. 하느님의 지혜는 묘해서 어떤 눈이나 마음
도 본 적이나 가진 적이 없는 성령이었다는 말씀이죠.
그러나 우리에게는 일상생활을 보고 판단할 때에 색안경을 끼고 바라본다는 거죠. 이걸 사도 바
올로는 ‘우리가 세상의 지혜를 붙들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신 거죠. ‘세상의 지혜’는 다름
아닌 ‘나의 지혜’ ‘자아의 지혜’ 이어서 세상을 보고 판단하는 방법이 ‘존재하는 세상 그대
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글라스를 벗고 육안으로 세상을 볼 때만이 칠흑같은 세상이 밝게 빗나는 성령의 길
로, 하나님의 길로 나아간다는 것이죠. 이때에 우리는‘하나님의 지혜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구나.’라고 할 수 있죠. 오늘도 이런 신비 속에서 하루가 시작하고 또 노을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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