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반암(bedrock)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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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올 예수님(믿음)/믿음

천국의 인간이란?

고지중해 2023. 1. 22.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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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선인장의 뿌리는 왜 그리 뿌리를 깊이 뻗어 내리는 걸까요. 선인장이란 식물이 생존
하기 위해서는 물기가 그토록 절실한 것이 이유입니다. 모래 바람이 시도 때도 없이 몰아치
고 팔방을 둘러보더라도 모래뿐인 황량한 사막이 있습니다. 이런 사막에서 우리들에게 목을
축여 줄 시원한 옹달샘과 같은 말씀이 바로 산상교훈입니다.


마태복음 5/10 : 의로움으로 박해받는 사람들은 하늘나라가 그의 것이다.” “여러분이 정
의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면 행복합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을 협박하더라도 무서워하거나 흔
들리지 마십시오.”(1베드로 3/14) 예수님을 추종하던 제자들의 마지막 길을 “박해”로 인
식하였고, 의미를 올바른 행위나 옳지 못한 행위에 대적하여 행동하려고 노력하는데서 찾으
려고 했습니다. 그래서€"의로움 때문에"받는 박해는 예수 그리스도께 충성 맹세로 인하여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대들이 받을 상은 하늘에 많이 쌓아놓고 기다리기 때문에 박해받는 것을 오히려 "행복해
하고",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답게 기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의로운 사람은 예수
님께 대한 그들의 사랑이 진실 됨을 증명하였기에 하느님의 길을 가도 자랑스럽게 여긴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을 받을 사람들이니까요.
마태오복음 5/7 : 자비로운 사람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얼핏 보아서는 지당하고 당연한
말씀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찌 모호해진다. 자비를 베푸는 자들은 자비로운 사
람인데 자비를 입는다??? 선하고 좋은 일을 행함으로서 하늘에서 복을 내려 주시겠지. 이렇
게 대충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예수님의 happy이론’은 명확한 이치에 근거하고 있습니
다.


그 이론을 파헤쳐 보면 ‘happy이론의 비밀’도 해석된다. 예수님은 ‘영성의 대가’로서,
이치에 맞는 말씀만 골라 하셔서 우리들의 맘속을 깊숙이 파고듭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오
로지 ‘맘속의 이치’에 관해 말씀하셨고 그 말씀 속에는 엄청난 과학의 열쇠가 녹아 있습
니다.
자기 육체의 입에서 타액 즉 침이 생성되어야 어떤 이에게 침을 뱉을 수가 있다. 그러므로

먼저 자기 몸의 입속에서 생성시킨 침액을 모으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그 다음에 입속의 침
을 누군가에게 내뱉으면 침을 뱉는 것으로 됩니다. 누구를 미워하는 미움의 독기도 내 몸속
에서 먼저 만들고 모아서 누군가에게 폭발시킵니다.
그렇다면 내가 만들어낸 미움의 독기는 누가 먼저 피해자일까요? 내 형제에게 ‘바보야!’
라며 이야기하기 전에, 자신의 맘속이 먼저 ‘바보’라는 기운으로 가득히 차게 됨에 따라
자기가 먼저 바보 때문에 선(先) 피해를 입는다는 것입니다.


똑 같은 이치로 자기 맘속에서 자비심이 생성되어야 베풀 수가 있습니다. 자비심이 생성되
는 순간 자기 맘부터 젖어들어 내가 처음으로 자비심에 젖게 됩니다. 그래서 남을 위한 사
랑과 배려의 생성은 내 맘부터 잠기게 되는 것이 순서의 이치인 것입니다.
마태오복음 5/8 :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땅과 하늘나라를 차지하다
가, 마침내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까지 말씀을 이어간다. 그럼 ‘깨끗한 마음’이 무얼까.
그리스어 ‘카타로스(Katharos)로 ‘씻어내리다’는 뜻이 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아무리
참회하고, 아무리 씻어내려도 죄와 함께한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쯤 완전하게 ‘깨끗한 마
음’으로 되는 것일까.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을 뵙게 되는 날이 언제쯤일까요.


분명 우리는 선한 마음이란 하느님이 거처하시는 마음이란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그
곳의 모든 착한 지향을 바라보고 계시는데, 이러한 마음은 항상 그분 뜻에 순종하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맘이란 뒤돌아서면 죄가 묻어나고, 또 돌아서도 죄를 짓는
다. ‘깨끗한 마음’으로 되어서 하느님 뵙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들이 대회에서 우승을 하거나 큰 상을 받을 때 “이 큰 영광을 하느님께로 돌립니다.”
라 말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 말에도 남다른 의미가 있는데, 하느님께 맡기지 않고 자기
가 영광을 차지하면 ‘깨끗한 마음’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광을 하느님께로 돌리면 우리 맘이 세팅되어 깨끗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하느님께로 희로애락의 감정
전부를 남김없이 맡기는 것이 그리스도교 영성의 심장이다.

영성의 모자람을 만회하려면 ‘하느님! 그 맛을 느낀다.’처럼 우선적으로 체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들에 진정 필요한 것은 생명의 말씀이지 생활의 관점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산상교훈’은 우리들에게 생활의 관점을 설명하지는 않으시고 생명 샘의 생수를 주신 거
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빌립보는 “하느님을 뵙게 해 주십시오.“라고 여쭈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나를 본 사람은 곧 하느님을 본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빌립보는 하느님이
보고 싶고, 궁금해서 여쭌 말이나 돌아 온 대답에 맘속이 새까맣게 탔을 것입니다. 손바닥
으로 만져야만, 육안으로 보아야만 믿을 수가 있는데, 지금 보고 있는 분이 하느님인데도
그것을 모르니 속에서 천불이 났을 것입니다.


루가복음 17/20에 보면 예수님께로 와서 질타하듯이 물었다. ‘하느님 나라는 언제 오는
지’ 그러나 예수님은 ‘최후 심판은 언제 이루어진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하느님 나
라가 오는 것을 볼 수가 없고, 하느님 나라는 너희들 안에 있다’라고 말씀하신다. 사람들
은 말문이 막히고 삶의 맥이 빠지는 말씀이나 실질적인 대답이 아닐까 싶다. 하느님 나라
는 우리들 마음속에 있고 그것을 찾아 나서야 하나, 그 길이 성서에 ‘산상교훈’에서 녹
아 있다는 것이다.
현재에는 위경이 되었으나 ‘도마복음’에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 관련된 구절이 있다. “천
국은 바로 너희 안에 있는데 이를 모르면 빈곤 속에 살리라.” 그래서 우리는 내 안의 하느
님 나라를 찾기 위해 산과 골짜기에서, 산중의 절간에서, 수도원 등을 찾아다니나 일상생활
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 안의 하느님 나라를 찾았다면 우리 밖에 존재하는 하느님 나
라도 찾을 수도 있으니까.


마태오복음 5/9 :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서로 소통되어야 서
로 간에 알 수가 있고 ‘있는 자’, ‘없는 자’와 간에 서로 알아야 다자간에 평화가 상존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변두리에 쫒긴 사람들과 빼앗긴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많이 가진 이들에게
‘나누어라’라고 탓하여 나무라신다.
따라서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은 ‘없는 자’와 ‘있는 자’간에 서로 알고 서로 소통하여 차단
시키는 벽이 없음을 의미함에 따라 이런 개념은 곧바로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뒤로 물러
나 있지 않고 용맹스럽게 나아가 행동하는 양심을 보이라는 것이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
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루가10/5-6)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은 ‘없는 자’와 ‘있는 자’간에 재물이나 재능을 아낌없이 나누도록
행동으로 옮길 수가 있는 자는 ‘있는 자’들일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는 사람들은
신과 자신도 서로가 통하다가 보니 하느님과 본인이 서로 공유하게 됩니다. 그렇게 사신 예
수님은 진정 하느님을 품으신 인간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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