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설교’는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의 입구이자 이정표이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항상 산 위로 오르셨다. 산 위로 오르시게 되면 갈릴리 호수가 한눈에 들어온다. 산에
오르신 예수님은 조용한 위치로 자리하시고,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신 후 내려오셔서 몸이나
마음에 병든 자들을 고쳐주시곤 하셨다. 하느님의 초월성으로 치료하시는 풍문은 순식간에
널리 퍼져나갔다.
사람들의 수가 많아짐에 따라 예수님은 산위로 오르셨다. 그때에는 소리를 크게 할 만한 기
구가 없었던 때이다. 햇빛이 가득한 낮에는 바람방향이 호수에서 산위로 불어 평상시 목소
리가 아주 멀리까지 전달되었으리라. 나지막한 작은 소리임에도 바람의 숨결로 산 위에까지
잘 들렸을 것이다.
‘산상설교(山上說敎)’로 일컫는 ‘예수님의 행복이론’의 전달하는 방법이었을 것으로 생
각할 수도 있겠다. 그 시기의 유대인들의 율법은 구원을 받기 위해 무엇보다 우선시 할 때
다. 또한 하느님의 구원을 구하기 위해 율법의 문구를 따져가면서 나름대로는 거룩하게 지
켰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율법의 형식을 파괴하여 살아 숨 쉬는 이단적인 설교를 행하
였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는 그야말로 혁명이고 혁신이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오 5/3) 무슨 의미인지 따져 봅시
다. “실제 가난해도 마음만이라도 부자이면 더 낫지 않는가. 진짜로 이해하기 어려운 얘기
다.” 우리는 영적으로 보다 풍요로워 질 때에 하늘나라에 보다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럼 예수님께서 의미한‘가난한 마음’이란 무얼까요. 그 의미가 ‘영적으로는 풍부한 사
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예수님께서 말씀한 ‘가난’에는 가난하고, 가난하여, 가난해지면 결국 무언가를 드러내기
쉬울 것 같은 가난함의 의미이다. 예수님은 “마음의 창고를 비워 가난하게 하라”고 하셨
는데, 우리의 마음의 창고는 항상 무엇인가로 가득 채우고 가기 때문이다. 이 마음을 채우고
서 가는 것이 애착이며 집착인 것이다.
내 마음속에서 창고를 채우고 있는 애착은 늘 본드처럼 착 달라붙으려고 하고 결코 떨어지
지 않으려고 하는 강력한 접착제이다. 애착을 가질 때 마음의 창고가 넘쳐흐르고 애착을 버
릴 때 창고도 빈 공간이 된다. 이런 가난의 논리를 전개하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마음을
가난하게 하여 창고를 비워두라!”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가 18/18). 예수님은 구약의 십
계명을 알려주었으나, 어떤 권력가는 “그건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너에게 아직 모자란 게 하나 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
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이어서 예수님
이 말씀하셨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루가 18/25)
성서에서는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빠져 나가는 것에 비유했는데, 부
자는 과연 못된 악인이란 말인가? 예수님이 말씀한 ‘부자’의 원래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정말 재산이 많은 큰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운 걸까.
예수님의 말씀을 보이는 문자로 그대로 해석하면 오해하기 쉬울 것이다. 선지자의 계명을 어기
지 않고 율법을 잘 지켰다는 뿌듯함을 갖고 있는 유대 지도자은 안목을 돌리고 마음의 창고를
비우고서 세상보기를 해보라는 것이다. 마음에 대한 전반적인 셑팅을 요구한 것으로 해석된다.
맘속의 전체를 비우고 비워서 하얗게 변화시키면 그 속에 새까만 흑점들이 보이게 마련이다. 자
신께 딱 붙어있는 접착제가 비로소 나타나기 때문이다.
마음속의 창고를 텅 비운 CEO와 재물에 대한 애착으로 가득 찬 걸인 중에 누가 하느님 나
라에 용이하게 갈수 있을까요. 재물이 많이 가졌다고 반드시 재물의 애착이 많다는 건 아니
고 재물을 가진 게 없다고 애착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들이대신 잣대는‘재물의
누적액’이 아니고 ‘애착의 누적액’인 것이다.
정상급 야구 선수들의 교본을 살펴보자. 힘을 빼라. 어깨에 힘을 빼고, 손목에 힘을 빼라. 왜
프로선수들은 자꾸만 “힘을 빼라”고 하는 걸까. 힘을 주어 치게 되면 타격 시 공의 비행
거리와 정확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경기를 잘 치려는 애착이 강할수록 몸이 굳어지고, 배
트의 스윙이 망가지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마음을 가난하게 하여 창고를 비워라.”고 하신 말씀은 비운 창고의 적막함 속
에만 있으라는 것은 아니고 고요함을 안은 채로 슬기로운 스윙을 하라는 거다.
어느 누구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예수님은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없이 말씀하셨다. “하
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가 없다.” 그럼 하느님을 섬기는 이는 재산을 모아선 안 되는
것일까? 경제를 위한 노동도 해선 안 되는 것일까? 재물은 어디까지 승인 되는 것일까?
여기에도‘가난한 마음’이 생각나게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동시에 섬기지 못한다고 얘
기하신 두 가지는 하느님과 재물이다. 우리들은 비움이나 애착을 동시에 구할 수 없는 것이
나 같은 말씀이다. 비움을 붙잡으면 애착을 놓쳐야 하고, 애착을 붙잡으면 비움을 놓쳐야 한
다. 예수님은 검소하게 살도록 “마음을 가난하게 하라”고 하시지는 않으셨다. 마음이 지독
하게 가난해지면 ‘없이 계신 하느님’이 나타나 존재하시기 때문에 마음의 창고를 텅 비워
야 하느님과 소통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유인 즉 ‘가난한 마음’은 ‘하느님 마음’이기 때문으로 이게 ‘신의 초월성’이다. 아
무런 애착도 집착되지 아니한 곳, 거기가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사람은 누구나 저세상에서 여러 갑절의 상을 받
을 것이며,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루가 18/29~30) 사람들은 이 말
씀도 이해를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무작정 팽개쳐 내버려야 된다고 사고하기 쉽다. 예수
님을 추종하려면 가족도, 부모님도, 처와 자식도 버려야 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래서 중동 땅으로 가 목숨을 내걸고 선교를 하는 선교사들이 있지 않을까. 예수님이 목적
하신 것은 이런 식의 맹목적 충성이 아닐 것이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까지 말
씀을 했다. 그런데 가족을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을까. 예수가 목적하신 것은 ‘사랑’
이 아니고 ‘애착’일 것이다. 가족이나 식구들에 대한 애착이 하느님 나라를 감추기 때문
이다. 애착을 갖고서는 진정 예수님을 추종할 수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가족에
대한 애착’을 감추라고 하셨고 그렇게 한 후에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 것이다.
“애착 없는 사랑이 불가능하지 않나. 애착이 있어야 소유욕이 있어야 사랑도 존재하는 것
이 아닌가.” 애착과 관련된 사랑은 인간적인 소규모의 작은 사랑이다. 다시 말해 사랑의
탈을 덮어 쓴 욕망이다. 예수님은 보다 큰 개념의 사랑을 말씀하신다. 결과는 항상 좋지 않
지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욕망을 자식에게 강요한다. 자신의 욕구를 없는 사랑
으로 자녀께로 임하면 지혜롭게 키울 수도 있다. 예수님은 그것을 ‘가난한 마음’이라 불
렀다.
가난한 마음이 되어 애착이 제거될 때 신의 숨소리가 들리고, 애착이 망가질 때 하느님 나
라가 나타난다. 그래서 예수님은 과감히 누차 강조하신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
가 그들의 것이다. 신의 초월성을 서로 공유할 때 피어나는 기쁨은 하느님의 마음에서 우러
나는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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