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를 가시다가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아께 ‘나를 따라 오너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주겠다’라고 말씀하시자 이들은 그냥 예수님을 따랐다. 여기서 ‘사람
낚는’이란 말씀의 의미는 과연 무얼까요?
전도를 열심히 잘하여 성당의 신자 수를 증가시키는 의미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서 내가 전도
한 교우의 수에만 신경을 쓰고 계급의 숫자 세듯이 숫자의 계급으로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
떤 기독교 교회에서는 일정한 교인 수를 증가시킴으로서 집사, 권사, 장로로 승진시켜주는 계급
의 필수적인 수의 조건이 되어도 되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이렇게 승진시키는 수의 조건처럼
단순한 것일까요.
맨 처음으로 갈릴리 호수 근처에 ‘사람 낚는 어부’ 임무를 담당하신 분은 예수님이셨다. 성서
를 찾아보면 ‘예수님 사람낚시 방법’은 상당히 어렵게 은유적으로 기재돼 있습니다. 예수님께
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 안에 있듯이, 너희가 내 안에 있어라.” 이것이 예수님의 사람 낚는
낚시법의 확실한 교안문구 입니다.
눈의 안목으로 보아서 아실 수가 있는 예수님의 실체는 ‘신의 초월성’입니다. “내가 너희
안에 있듯이” 나와 당신 안에서, 우리와 모두들 안에서도 함께 존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 거대한 우주세계 속에도 빈틈없이 신의 초월성은 차고 넘친다. 애써 사람을 낚을 까닭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착시현상을 없애기 위해 안목을 변경하라고 하신 것이
죠.
인간을 만드실 때에 인간과 하느님의 초월성은 서로 같은 것이었다. 선악과를 따 먹었음으
로 빈틈이 생겨났다. 더 이상 아담은 하느님 안에 있지 않으셨다. 그것 대신‘자신’이라는
자아 속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이 어디에 있었는지에 관해서는 이제는 아무런
관심도 없게 된 것이다.
‘선악과’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관계에서 ‘죄 의식’이란 ‘큰 간격’이 생깁니다. 그 사
이를 메우기 위해서 예수님이 우리들에게로 오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다시 돌아 오거라,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품안에 네가 거하고, 너희 품안에 하나님께서 거하게 만들어 주리라.
‘선악과’로 인해 인간 속에서 이제는 하나님을 찾을 수가 없게 된 것이죠. 산상설교에 나
오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가난한 자, 온유한 자, 자비를 베푸는 자, 마음이 깨끗한 자 등 그
들은 모두 선악과를 따먹기 전의 아담과 이브와 같은 자가 아닌가요. 그러니 예수님은 산상수
훈을 통해 선악과 사건 이전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신 거죠.
예수님 낚시법 본론의 말씀은 자기의 안목을 덮고 있는‘자아의 장막’을 벗고, 당초 아담
이 갖고 있던 ‘하느님의 안목’을 회복시키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당 신자님의 숫
자를 증가시키는 것과 ‘사람 낚는 어부’와 같은 의미로 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우리들이 사랑하며 눈에 잘 띄는 재물, 멋진 차, 명품아파트, 돈 등을 ‘색’이라
하고 “색을 제 손으로 쥐지 말라”고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들은 ‘화폐의 색’을 움켜
쥐려고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인생에서 제일이고 잘살아 보려면 꼭 필요한 인자라고 생각
하기 때문이다. 이 녀석 재물들은, 즉 색은 잡으면 잠시 있다가 소진되고, 또 잡으면 얼마 있
지 않아 없어진다. 이래서 우리들은 색을 더욱 세차게 거듭하여 움켜쥔다. 재물을 쌓고 또 쌓
는 이유이다.
하지만 이렇게 ‘소진되는 재물’의 정체를 완전히 알게 되면 그때부터는 변화가 진행된다.
바로 ‘공’이 존재한다. 전혀 존재하지 않는 ‘허공’이 아니고 이 세상을 채워 메우고 있
는 공인 것이다. 여기에는 소진이나 사라짐이 없습니다.
가끔씩 예수님의 이적행위에 대하여 사실인지 따지거나 궁금해 하기도 한다. 이것은 사람의
아들의 ‘신의 초월성’에 관한 사실들로서 우리들이 움켜쥔 모든 색들, 욕망들, 애착들, 죄
책감들이 예수님 앞에서 ‘0’으로 세팅되어야 한다. 이것이 죄의 회개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리로 다시 생각하고 ‘재입장하라‘ 하신 것이다. 이것이 진정 ‘사람 낚는 어부’의 의
미심장한 얘기이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나와 이전의 나 사이에는 존재 양식에 변화는 없습니다. 살아가는 방식도
여전히 동일합니다. 우리들은 계속해서 회사로 출퇴근하고, 학교에 등하교하고, 취업스트레스,
경력 쌓는 문제, 결혼문제 등등은 변함없이 우리 앞에 던져져있습니다. 여전히 바다 한가운데
나아가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야 하고 또 늦은 밤까지 수고하고 돌아온 뒤에 내일 준비를
위해 그물을 기워두어야 합니다.
이런 분주한 우리들의 일상은 늘 변함이 없습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인간 존재의 사유를
알게 된 것입니다. 내가 왜 고기 잡는 어부로만 살아가야 하는가? 예수님은 “사람을 얻어
모든 이의 영생을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영혼은 주님께서 인도하시지만 우리들의 삶
은 사람의 구원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한 ‘깊은 곳’은 호수나 산속의 어딘가가 아니고, 그 곳은 ‘신의 초월성’
이 깃들어 있는 우리들 맘속 깊은 곳이다. 우리들이 다시 찾아할 영적인 고향인 것이다. 자
신의 아집이 허물어지는 곳으로, 집착에 가려서 볼 수가 없었던 내 맘속의 영적인 고향인
‘깊은 계곡’이다.
우리를 세팅하여 가지려고 노력하던 모든 색들을 내려놓음은 죄의 회개로부터가 시작입니
다. 이렇게 하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 진정한‘사람 낚는 어부’로 다시 입장하라고 하신 것
이다
‘이번 주는 계명을 지켰으니 맘이 뿌듯해’‘가난한 이웃에 도움을 주었으니 내가 정말 자
랑스러워’‘올해는 교무금을 100% 납부했으니 하나님도 아시겠지.’ 이렇게 선과만을 선
택해서 먹은 나는 업적을 쌓고 또 쌓으려고 하겠죠. 선한 행동 다음에 뿌듯해 하는 나, 선행
이라는 결과에 깊게 색칠해 버리는 나를 아버지께서 갚아 주신다고 얘기하신 것은 아니겠지
요. 이런 나를 보면서 예수님께서는 나의 맘속에 전혀 남아 있지 않아야 갚아 주신다는 것
이다.
세상에서 재물을 얻는 것만이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것만이 유일한 즐거움이 되지 말고 우
리들의 마음과 생명인 성령이 함께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함께하기 때문에 하느님
께 영광을 돌릴 수가 있고, 우리들의 육적인 생각보다 하느님나라의 영적인 생각을 먼저 해
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이 되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언제든지 지금 하
느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내 안에서 성령으로 충만할 때에 하느님과 동행하게 되고 예수 그
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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