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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올 예수님(믿음)/믿음

내 마음에서 하나를 내려놓을 때에

고지중해 2023. 1. 22.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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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시기에 유대인들은 이집트에서 노예로 생활을 하였으나, 이집트인들은 태양신을 믿
고 있어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당연이 우상숭배로 보였을 것이다. 로마제국의 통치를 받던
유대인들은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떠올리며 모세의 도움으로 이집트를 떠나 탈출하였듯이,
누군가 제2의 모세가 나타나 로마제국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항시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율법을 중요시하였을 것이다.


이때에 중동지역에는‘독립된 유대’만을 생각하는 단체가 있었는데, 로마제국에 저항하여
독립된 나라를 이루어내겠다는 자들로 ‘열심당(熱心黨)원’이 있었다. 갈릴리 호수근처에는
열심당원 세거지로서 이쪽 사람은 ‘저항하는 기질’이 매우 강하게 남아 있었다. 예수님의
말씀을 청취하는 자들 가운데에도 소속당원들이 꽤나 있었으며, 예수의 제자 시몬과 유다
역시 열심당원으로 간주되는데 그들은 예수님이‘하느님의 외아들’이시면‘유대 민족을 식
민지 백성에서 해방시켜 주십시오.’라고 예수님께 간청 드리지 않았을까?


유대인들은‘다윗 자손들 가운데서 메시아가 나타나 우리민족을 구해낼 것’이라는 막연한
유대교적 믿음을 가진 자들이 많이 있었다. 다윗의 자손들은 베들레헴 근처에 모여 집단적
으로 살고 있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예수 시대에는 ‘신의 아들’이신 그분에게 ‘로마의
통치로부터 해방’을 고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20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예수님을 ‘인간성
해방’ 과 ‘영혼의 구원’으로 구분하여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이유인 즉,
마태오복음과 루가복음의 ‘산상설교’는 서로 상이하다는데 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오)과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루가)은 비교하면 ‘마음이’이 있고 없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오복음서, 그냥 ‘가난한 사람들’은 루가복음서에서 기재되
어 있다.


계속해서 ‘불행한 사람들’도 지적한다. ‘부유한 사람들! 이미 위로를 받았다’‘지금 배
부른 사람들!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부유하고, 배부른 이들은 현재에는 모자람이나 부족함
이 없다. 그래서 보는 안목을 자기 안으로 돌리지 않는다. 마태오복음서는 산에서, 루가복음

서은 평지에서 말씀을 하셨다. 이렇게 말씀에 대하여 이해하는 잣대를 놓고 진보와 보수로
나누어진다.
진보 측에서는“‘가난한 사람들’을 주장하여 물질적 가난함은 사회적으로 빈자나 약자를
위한 말씀이다.”고 해석한다. 보수 측의 사람들은 “예수님은 ‘영적인 가난함’을 말씀했
다. 사회적 문제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오로지 영적 가난함에 기초를 두는 것이 예
수님 의지”이라고 해석한다. 진보는 ‘가난한 사회 구원’에, 보수는 ‘개인품성 구원’에
중점을 둔다고 보면 되겠다.


“나는 알파이며 오메가, 곧 처음이며 마지막이며, 시작과 끝이다.”(요한묵시록 22/13) ‘일
부분’이 아니라 ‘모두’라는 뜻으로 ‘시작하면서 즉각적으로 완료됨’이다. 진보와 보수
를 모두 갖는 ‘큰 중도’라는 얘기인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실존체이며, 전능하신 분의
‘신의 초월성’이다.
‘의로움’이란 무얼까. 로마제국의 원형경기장에서 사나운 사자의 먹이 감이 되어 가면서
까지도 본인의 믿음을 포기하지 않은 자들, 요즘에도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목숨을 내놓
은 상태에서 중동으로 가는 교인들, 이들이‘의로움에 주린 자들’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할
수가 있겠으나 예수님이 말씀한‘의로움’은 조금은 다르다. 꼭 목숨을 담보해야만 의로움
의 행위로 판단하는 건 아니었다.


예수님의 의로움은 무엇에 적합할 때 의롭다고 한 것일까. 그렇다. 적합할 때 비로소 만족해
진다. 내 맘이 흡족하면 모든 것은 결국 사라져 없어지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들은 자기가
배부르면 그 다음에는 먹는 것을 처다 보지도 않는다. 그러니 신의 초월성을 애타게 구하는
사람으로 여기에 적합한 사람들은 “의로운 사람들!”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목숨을 거는
것이 아닌 내 속의 아집을 하나 꺾을 때, 내 속의 욕망을 하나를 놓을 때 나는 ‘의로운 사
람’이 된다.
1.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물질에 대한 집착이나 욕망을 포기하고 마음을 비웠기 때문에 가난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
게 텅 비운 마음을 가진 이가 가난한자가 되는 것입니다. 재물에 대해 쌓기를 버리고, 버리
고 버릴 때에 마음의 창고는 텅 비워져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자기가 가지고 의탁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즉 재물로부터 자유로운 내적인 자유를 향유할 수 있게 된다.


2.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버릴 때, 자신의 꿈이 이루어지지 못할 때, 정든 이가 떠나 갈 때 등
사람들이 슬퍼할 때로 자기 슬픔을 충분히 슬퍼해야 정서적으로 경직되지 않는다. 인생살이란
모름지기 한 개를 택하면 다른 거는 놓치게 되는 것을 알게 되면 놓친 것을 충분히 슬픔에
젖어야 합니다. 다만, 노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그냥 슬퍼하십시오. 인생이란 한줌 조각구름이
고 죽음은 한줌 조각구름이 사라진 것인걸 알게 된다는 것이죠. 슬퍼 움직이는 것은 바람도
깃발도 아닙니다. 그건 바로 여러분들의 마음이 슬퍼 우는 것이니까요? 이렇듯이 슬픔을 뚫고
나아갈 때에 우리는 영혼의 바닥과 만나게 됩니다.


3.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 할 것이다.
‘온유하다’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사람이나 그 표정, 성질이)온화하고 부드럽다”로 되
어 있듯이, 온유한 사람들은 ‘비폭력적인 사람들’로 해석할 수도 있다. 자기 자신의 조그
만한 실수를 잔혹하게 다루어 즉각 단죄해버리곤 한다. 그래서 ‘온유한’이란 자기 내면의
세계가 불안한 결과로 나타나는 잔혹함에 반대되는 의미로, 내 삶속에서 모든 것을 인정한
다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은 내 속에 조금만 떼어내어 모든 것을 포용함에 따라 이런 사람
은 반쪽 사람들이어서 결코 하느님을 만날 수가 없다. 내 속에서 모두를 인정함에 따라 그
만큼 더 넓어지게 된다.


4.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 질 것이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
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마태오복음 1/19). ‘남모르게’ 왜 파혼
하려고 할까요? 이는 마리아에게 살아갈 방도를 준비해 주기 위해서이다. 하느님께서 보셨
다면 요셉의 마음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하실 수가 있다는 것이다. ‘한 차원 높은 사
랑’을 가져야 ‘의로움’의 기준이 된다. 자기 목표를 뚜렷이 가진 사람들은 즉 ‘자기완
벽주의를 지키려고 하고, 원하는 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 언제나 성공만을 원하는 삶은 인생
을 똑바로 평가하지 못한다. 의로움은 나의 삶을 바로 판단하는 것으로 얼마나 바로 살고
얼마나 정의롭게 사는가에 달렸다.


5.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히브리어로 ‘자비’란 ‘모태(母胎)’를 뜻이다. 어떤 어머니가 자식을 평가해서 순서를 매
기겠는가? 오히려 순서의 말미인 꼴찌를 돌본다. 이래서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자비롭듯이 너희도 자비로워라’고 했다. 예수님께서는 순전히 저희에 대한 사랑으로 극심
한 고난을 이겨 내시면서도 완전히 자기를 낮추시어 오로지 자비와 상상 초월한 사랑 때문
에 십자가상 죽음의 순간에도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가 23/46)라
하시는 유언을 남기었습니다. 지극히 사랑하올 하느님의 은총과 그 깊음을 알 수 없는 자비
시여! 불쌍한 죄인은 영원한 생명을 간구합니다.


6.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하느님을 볼 것이다’라는 것은 단언하신 말씀이지만, 우리는 과연 인간이 하느님을 볼
수가 있느냐? 라고 의문을 품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의 근본적인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단호히 말하지만 깨끗한 즉 ‘죄가 없는’ ‘순수하고 정결한’ 마음을 가진 자는 하느님을
볼 것이다. 하지만 ‘모세도 하느님을 뵙지 못 했습니다’ 만은 ‘본다’의 의미를 우주와
같이 큰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할 수가 있으면 뵌 것이나 다름없지 않을까요? 모세는
거룩하신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임재의 경험으로 얼굴에 광채가 났다고 하니까요. 요한1서
4/12에 ‘아직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느님께
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그 사랑을 나누는 깨끗한 마음을 가
지면 우리는 하느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7.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누가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일까? 일상생활의 비폭력적이고 위험을 회피하고 웃고 친절한
것이 평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에게 자비로운 분으로 ’평화를 이루는
사람‘의 핵심은 변두리에 쫒긴 사람들과 빼앗긴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많이 가진 이들에게
탓하여 나무란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의미는 평화를 이루려는 사람으로 행동으
로 옮겨야 한다. 바로 뒤로 물러나 있지 않고 용맹스럽게 행동하라는 것이다. 하느님을 볼수
있는 첫째 조건은 마음이 깨끗해야 하고 어떠한 단서가 붙지 않아야 할 것이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루
가복음 10/5-6)


8.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여러분이 정의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면 행복합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을 협박하더라도 무
서워하거나 흔들리지 마십시오.”(1베드로 3/14) 예수님을 추종하던 제자들의 마지막 길을
“박해”로 인식하고, 의미를 올바른 행위나 옳지 못한 행위에 대적하여 행동하려고 노력하는데서 찾으려고 한다. 그래서€"의로움 때문에"받는 박해는 예수 그리스도께 충성으로 인하
여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대들이 받을 상이 하늘에 많기 때문에 박해받는 것을 오히려 "행
복해하고",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답게 기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의로운 사람은
예수님께 대한 그들의 사랑이 진실 됨을 증명하였기에 하느님의 길을 가도 자랑스럽게 여긴
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을 받을 사람들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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