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은 거의 없을 것으로 보이고 산성화된 토양과 얕은 산들이 계속하여 이어지는 곳.
“아, 이런 곳이 말로만 듣던 광야로구나” 예수님이 수행을 위하여 가셨던 광야는 이런 풍
광일 것으로 생각된다.
‘나’를 넘어서고 없애버리고 무시하는 곳, 여기서 탄생하는‘무한대의 우주’를 깨우쳐
인식하는 곳. 이런 곳이 광야의 무대 모습일 것이다. 바람의해 생성된 모래 지평선이 끝없이
계속되는 보통의 아라비아 사막과는 다르고, 조금은 거칠고 순조로운 대륙이다. 광야지대는
이런 단조로움과 메마름이 상존해 있을 것이다.
산 중턱부 조그마한 공간마다, 빈터가 있는 계곡마다, 수행처가 존재하는 우리나라의 유명산
수도사가 있는 곳마다‘나름 수도자’들이 들락거릴 것이다. 예수님 시절에도 광야에서 수
도하는 여러 공동체들이 있었으며 절벽의 동굴 같은 곳에서 주로 생활을 하였을 것이다.
광야는 산성화되고 푸석푸석한 아주 메마른 토양으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다. ‘광야’는
eremos이고 ‘에래모스’는 ‘텅 빈 부분’이란 의미도 갖고 있습니다. 비어 있는 것으로
빈 곳에 가득차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광야는 메마른 공간만 뜻하는 게 아니고 그 공
간을 꽉 채워 메우고 있는 공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나’라는 자아를 비우고서 보면 나
타나는 우주 생성이전의 먼저 우주 공간이 나타난다.
메마른 모래바람이 거세게 부는 광야에 서 보면, 보다 멋있게 살아가려고 애쓰는 자기 자신
의 하루, 늘 노력하지만 스트레스로 가득찬 자기의 일상이 있는 곳이 바로 ‘광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나의 맘속에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악귀’가 왔다가 가곤 합니다. 자
기 경력을 쌓고, 재물을 쌓고 쌓는 유혹이 때때로 파도가 되고 한 밀물이 되어 우리 맘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꼬드김에 ‘내 자신’을 내던지고서 밖으로 외치셨다. “하
느님만을 섬겨라.”
우리들도 구체적으로 본 것만을 믿으려고 한다. 과학적 합리주의의 사고 속에서 배우면서
살아온 우리들은 곧 잘 실존만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종교를 곧잘 과학의 잣대로 이해하려고 하는 지도 모르겠다. 과학적이라고 하는 맹신에 빠
져 종교조차도 과학적인 마인드로 재단하려는 우리의 사고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누가 뭐래도 하느님은 없이 계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몸이 아니다. 얼(靈)이다. 얼은 없이
도 계신다. 절대 큰 것을 우리는 절대 못 본다. 아직 더할 수 없이 온전하고 끝없이 큰 것을
무(無)라고 한다. 그래서 나와 여러분은 없는 것을 믿고 있다.
내 눈에 보이고 있는 것, 내 손에 잡히고 있는 것, 내 마음에서 거머쥐고 있는 것. 이렇게
있는 것을 불교사상에서는 ‘색(色)’이라고 지칭한다. 우리들 가운데 있는 것의 갖가지 모
습과 감정들이 전부가 형상입니다. 우리는 이런 형상들을 ‘상존한다.’고 믿음에 따라 확
움켜쥔다. 그것이 집착이자 애착입니다. 집착이 있는 곳은 ‘빈 공간’이 나타나질 못하고
그래서 ‘허공과 같이 없이 계신 하느님’도 존재하지를 못합니다.
악귀는‘내 속의 욕망이나 욕구’로 그것들이 ‘빈 공간’을 감추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허
물어지고 없어져야 ‘없이 계시는 하느님’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모든 공간 속에 이미 하
느님이 존재하여 계십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흐르는 계곡천이 흘러들어 이스라엘 남쪽에서 한곳으로 모인다. 이곳이 해
수면 -416m 사해로서 세례자 요한의 주된 무대였다. ‘생식이자 자연이 준 식사’인 야생
메뚜기와 꿀을 주식으로 먹고 살았다. 가죽으로 된 띠를 두르고 낙타털 옷을 입고 다니셨는
데, 그는 긴 세월 광야에서 보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기 위하여 세례자 요한을 찾아오셨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
시며 강물에서 나오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마태오복음 3/16)
오셨다고 하는데, 성령이 내려오시는 길을 뚫으려면 하늘이 개방되어야 한다. 하늘이 뚫리지
않고서는 성령이 내려오실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하늘을 개방하지 못하
는 것일까.
그때에 당시에는 유명한 인사였던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인기가 높아 소문이 많이 났으며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자기 뜻은 꼿꼿이 세우고, 오직 세례만 받으려는 이들에
게 한 말씀이 있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
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마태 3).
‘예수님 시기’뿐만이 아니고,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도 마음을 조정하며 겨눈다. 어쩌면
너와 내가 ‘뱀의 자식’이 될 수도 있다. ‘천당행 차표’를 구입하고자 성당으로 나가고,
얼굴에 성수만 묻히는 세례를 받고서는 서로 교인이라 할 수도 있겠다.
선악과는 당초부터 갈라짐이 없는 하나의 열매였으나, 따 먹음으로서 선와 악으로 세상은
갈라졌다. 이때부터 인간들은 두개로 나누어져 출발하였고 사랑스러운 것과 증오스러운 것,
뽐내고 싶은 것과 수치스러운 것 등으로 두개로 갈라졌다. 하느님께서 아담을 찾으셨다. 하
지만 아담은 하느님 앞으로 나올 수가 없었는데 성서에서는 ‘수치스러움을 알고 있기 때
문’이라 기재되어 있다. 이것이 쪼개어짐의 산유물이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평범한 어부로 생활하던 베드로는 한정된 테두리를 이탈하지 못한 변두
리 사람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남에 따라 새로운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한 것이다. 성육
신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와 주심으로 이루어진 ‘메타노미아’의 결과
였습니다.
예수님 시절에는 지중해 일대에 공통어인 그리스어로 ‘메타노이아’는 ‘회개’의 뜻으로,
이걸 ‘回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시던 아람어에서는‘타브’로 대치
된다. 타브의 개념이 ‘돌아옴/회복’ 뜻으로 해석되고, 그럼 예수님께서는 도대체 어디에서
돌아오라고 하시는 것일까.
‘예수님의 안목 즉 눈’은 어떠한가.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
들의 것이다.” 우리의 눈과는 전혀 상이한 안목을 갖고 계신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얼
마나 안타까우며 없어서 측은해 보이기조차도 합니다. 우리생활 습관으로는 항시라도 무언
가 눈에 보이는 형상을 가득 채우고 또 채우고 채워갑니다. 이렇게 마음을 많이 가짐으로서,
가득 차서 넘치는 부자가 되면 행복해진다고 여기기 쉽죠. 이것이 우리들의 식견이자 안목
입니다.
바람은 불어야지만 스치는 바람 맛이고, 국기가 깃발이 되려면 펄럭거려야 깃발이 되겠죠.
거센 바람에 국기는 펄럭이나, 이렇게 펄럭거린다는 것은 모두가 내 생각입니다. 아침에 꼬
꼬하며 먹이를 찾는 닭들도 쫓아내면 마당에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만이 있습니다. 그
렇게 이 넓은 세상을 직시하라는 것이죠. 이렇게 살아야 진흙탕 속에서 물들지 않고 피어나
는 연꽃을 알게 된다는 거죠.
슬픔도 고통도 괴로움도 펄럭거리는 깃발과 같은 내 마음이 슬퍼서 그런 것이니 노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그냥 슬퍼하십시오. 서산대사의 말씀처럼 인생이란 한줌 조각구름이고 죽음
은 그 조각구름이 사라진 것인걸 알게 된다는 것이죠.
기독교의 방언의 역사를 아시나요? 이걸 두고서 ‘성령의 은사’ 또 다른 이는 ‘하늘의
언어’라고도 합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이런 방언에 관해 의문스럽게 보기도 합니다. ‘신
앙에 허영’ 라고 방언에 비난하는 이도 많으며 기독교에서 오랜 된 논쟁거리이며 숙제이기
도 하죠. ‘방언 = 인식할 수 없는 말’은 과연 뭘까요? 정말 우리들이 도저히 인식하지 못
하는 말일까?
낯설고 낯선 이 방언들의 가운데 가장 낯선 사투리가 ‘성서’입니다. 듣고 또 듣지만 우리
들은 이해하여 행동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등의 의문투성인 방언들이 너무 많죠.
슬퍼하는 사람들이 왜 행복해지게 되는 걸까? 내 귀로 청취하고도 그 의미를 모르니 ‘성
서’는 그대로 방언으로 되고만 겁니다. “이상한 언어로 일만 마디 말을 하느니 보다는 차
라리 내 이성으로 다섯 마디의 말을 하고 싶습니다”(고린도전서 14/19) 라고 하니, 정말로
방언이 무엇인가? 하늘에서 출토되어 나온 소리, 그런 소리를 모은 것이 성서임으로 우리에
겐 이런 방언의 책을 진정한 뜻으로 찾아 읽으면 방언을 읽게 된다는 것이죠.
이런 예수님의 방언들로 가득한 성서의 구절들 ‘마음에 쌓지 말고 가난하게 하라.’, ‘나
는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갈라서기 위해 오셨다.’ 등의 ‘예수님 방언’들을 한 개씩, 한
개씩 이해하고 추리력과 사상력을 키워 이해하고 행동함으로서 우리는 주님께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전도하면서 ‘예수님’을 우리들의 두목 아니 보스쯤으로 생각하는 경향
이 있는데요, 옆에서 자꾸만 예수님 편을 들고 내 편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이렇듯이 예수님
편을 드는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살지 못해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소리쳐 외치십니다. “하느님 나라가 여기에 있으니 마음의
안목을 바꾸어라.” ‘나의 안목’에서 ‘신의 안목’으로 변경하라는 뜻이다. “마음의 안
목을 그분께로 향하여라. 그곳에 하늘나라가 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음성을 듣는지요? 맘의 안목을 하느님께로 향하여 드리는 기도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게 하는 힘입니다. 기도는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비우고 하느님의 음성
을 들으려고 하는 자세이어야 입니다. 틈나는 대로, 아니면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이라도 ‘내
것으로 가득 찬’ 마음을 비우고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께 귀 기울여보면 어떨까요?
삶이 바뀔 것입니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을 하지 마십
시오.”(로마 13/13-14)
---- 잘 보셨으면 "좋아요" 부탁해요? 010-3816-1998. 감사함다. -----
'사랑하올 예수님(믿음) > 믿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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