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가 3/6) 원래 이 대목은 BC 6세기경
바빌론에 잡혀갔던 유대민족들이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오리라는 희망을 얘기하는 예언입니
다.(이사 40/3-5) ‘모든 사람이 주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내용으로, 작자인 루가가 이것을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로 변경시켜 넣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요한 세례자를 ‘모든 사람이 보게 될 하느님의 구원’을 준비하는 인물로
소개하며, 어조를 볼 때 그 구원이 가까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로 세례를 선포하는 요한 세례자의 외침은 더욱 힘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누구도 오신 까닭이나 깃든 ‘신의 초월성’을 알고 접근한 사람은 없었으
므로 얼마나 고독하였을까? 그 때에는 나사렛 작은 마을에 거주하며 목수 일을 하는 촌놈
요셉의 아들로만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달리 알았으며, 그분은 세상을
구원하실 분으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도 세례를 주시고 왜 예수님을 따라
나서지 않았는지에 대해 성서에는 기록이 없다.
요르단 강에서 예수님이 세례를 청하였을 때 요한은 “세례를 받아야 할 사람은 당신이 아
니라 접니다.”(마태오 3/14)라며 오로지 예수님을 알고 계셨던 요한은 극구 만류했다. 세례
자 요한은 성서에 기록은 없지만 ‘하느님 나라’와 ‘신의 초월성’에 관한 신비에 대하여
예수님께 의문을 표시하며 많은 대화가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의 죽
음을 애달파하며 슬퍼하지 않았을까.
갈릴리 호수 일원에는 크고 작은 마을들이 있었고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서로들 모여서 신앙
생활을 하는 회당이 존재하였을 것이다. 구약에 하느님께서 천지를 만드시고 마지막 7일째
는 쉬셨다고 한다. 일요일부터 시작하면 마지막은 토요일이 됨으로 유대교에서는 안식일이
토요일이 되는 사유이다. 토요일에 회당을 찾는 까닭은 예수님은 유대인이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어느 누구든지 마음을 꽤 뚫고서 시원하며 막힘이 없습니다. 마르코
1/22에 ‘가르침에는 권위가 있었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가르침이 우리들의 상황 속에
서 그대로 화살이 마음속으로 정확히 박힐 때에 ‘권위’가 생기지 쉽사리 생기지는 않는
것이다. 예수님의 고향인 나자렛은 갈릴리호수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 어여쁜 어린
예수님, 청소년시절 예수님, 성년의 예수님은 갈릴리호수에서 자라남이 추억이 되어 있겠
지.
“선생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밖에서 부르고 계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고, 누가 내 형
제라고 생각하는가?” 하느님 뜻을 실행하는 이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마르코
3/35) 예수님은 반항아 기질의 대답이었다. 하느님의 뜻을 그대로 실행에 옮기는 인간은 누
구이겠습니까. 그런 분들은 하느님의 의지에 맹종하는 인간이다. 거룩한 주일을 지키기 위해
성당에 나가고, 매월 교무금과 헌금을 하고, 성당에서 봉사하는 게 과연 맹종이겠습니까? 아
니면 가톨릭 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에 사제가 되는 것이 과연 맹종일까요?
‘어리석은, 우스꽝스러운’이라는 뜻의 ‘absurd’는 ‘귀머거리(청각장애)’ 뜻하는
‘surdus’에서 왔다. 우리 맘속에서 말씀하시는 분의 음성에 귀먹은 상태로 사는 것이
곧 어리석은 삶이란 것이다. 우리가 참여하고 어울리는 많은 활동, 우리가 몰두하고 연구
하는 여러 관심사, 우리를 에워싼 많은 잡음이 하느님의 현존을 알게 하시는 맘속의 작은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들의 맘속의 음성을 들으려면 이런 활동, 잡음에서 조금
은 멀어져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신부님이랑 수녀님은 우리들의 일상에서 낮은 담을
쌓고 지내는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음에는 ‘불맹종하는 인간’을 찾아봅시다. 하느님의 의지에 불맹종하는 인간은 누구겠습
니까? 믿는 종교가 나와 상이하거나 달라서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 부류의 사람들이거나, 종
교가 아예 없는 다른 사람들이라 볼 수도 있겠죠? ‘우상을 섬기지 마라’라는 십계명이 있
는데, 흔히 머리 숙여 금불상에 절을 올리는 것을 우상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느님보다 더
막강한 영향력을 행하여 ‘절대 권위자’를 섬기는 것이 바로 우상이라는 것이다.
이런 ‘절대 권위자’로 ‘나’를 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를 생각하는 나의 애착들은
‘명예’ ‘재물’ ‘건강’ 등으로 이루게끔 하느님께 기도하며 원한다. ‘나의 뜻’이
하느님의 의지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이 ‘나의 뜻’에 따라 하느님이 움직이기
를 원한다. 그리하여 기도할 때에 “~하도록 해주십시오!” “ ~되게 해주십시요!” 그러
니 나를 하느님께서 섬기시는 것이 아니고 뭐시겠습니까?
보다 더 막강하게, 더 열심히 섬기는 ‘나의 신’ 그것이 하느님 의지에 불맹종하는 사람
들로서 ‘나의 의지’에는 맹종합니다. 그러므로 불교인들이 법당에 꿇어앉자 보는 불상
이 우상이 아니라 우상은 ‘내 자신‘라는 것이다.
참 신기하고 이상하게도 ‘나의 뜻’이 성취될 때만 우리들은 왜 ‘신의 뜻’이 이루어졌
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야구 게임에서도 내가 홈런을 쳤었을 때에만 하늘에다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걸까요. 목수가 육체의 껍질이었던 나사렛의 예수님께서는 안목은 넓으셨
으며 무한적으로 깊었다.
마태오복음 10/34에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시이소오의 양끝에 '평화'와 '칼'을 놓아두었습니다. 시작[알
파]과 끝[오메가]이 하나이듯 평화와 칼 또한 하나로 보는 것이죠.
예수님은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다.(마태오10/35~36)"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칼'을 들고 집안
식구들에게 평화를 주기 위해서 우리를 후려치실여고 한 것은 아니겠죠. 이렇게 하려면 우
선적으로 '식구'란 탈 껍질과 색안경을 벗으면 됩니다. 이런 애착과 바램이라는 물체가 뭔지
알아야 합니다. '식구가 나의 적이 구나', '식구에 대한 애착이 나의 적이 구나', '식구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는 내가 내 적이로구나'를 알게 되는 거죠.
이런 ‘애착이나 바램을 끊지 않은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내
적’인걸 알기 전에는 사랑과 평화가 싹트지 못합니다. 적은 왜 적인가, 바로 내가 판단한
적들로 내 안에서 그걸 제거하라고 하신 말씀인거죠. 그래서 “적을 사랑하라”고 당당히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옹고집, 애착, 욕망, 집착 등이 하나, 둘, 셋 이렇게 모두 없게 되면 결국 과연 무
엇이 남게 될까. 그곳에는 신의 초월성만이 남아있게 된다. 그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
인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신 즉 우상은 섬기려 해야 섬길 수가 없으며 섬기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 안목 속에서 예수님은 묻고 답하였다. “누가 나의 어머니이고 ∼
” 예수님은 보시는 눈이 우리들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으며 그것은 신을 품은 안목에서
만 해석 될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늘 한눈을 팔아 ‘엉뚱한 신’을 섬기게 된다. 그 높으신 신의 성함은 바로 '자신'
이죠. 자신의 옹고집, 애착, 욕망, 집착 등을 버리고 않고 ‘자신’이라는 신을 앞세웁니
다. 이런 것이 바로 나의 안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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