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반암(bedrock) 세계

nugget

Nugget-story

사랑하올 예수님(믿음)/믿음

그 분은 진정 신을 품은 인간이었다.

고지중해 2023. 1. 22. 19:15
728x90
반응형

그분께서는 과연 인간의 아들이었을까요? 아님 하느님의 진정한 외아들일까요? 2000년 전
중동 베들레헴 지역에서 유대인으로 출생하셨던 예수님의 외견 모습도 현재의 아랍인들 같
이 저런 모습이었을까? 이렇게 생긴 얼굴에, 저런 피부색깔로 탄생하지 않았을까?
예수님의 출생은 단연코 충격, 그 자체이었으니 말이다. 처녀상태의 어린 마리아께서 예수님
을 잉태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 시대에 결혼식은 양가의 집안이 서로 합하는 것이었고, 그
래서 결혼 상대자도 양가 집안의 어른인 부모님이 대부분 결정했다. 당대에는 집안의 명예
를 목숨만큼이나 중요시했고 결혼 전에 처녀가 임신을 하였다는 건 말도 되지 않는 것이었
다. 임신한 여자는 돌에 맞아 죽는 게 집안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것이라 생각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요셉의 식견에서 마리아는 얼마나 못마땅하였을까?
홀연히 나타나신 천사께서 말씀하셨다. "무서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라고 말씀은 하시나,
마리아에게 앞으로 몰려올 '태풍의 느낌'에 무서운 전율을 느꼈을 것이다. 그럼 마리아께서
는 이때쯤 과연 몇 살 정도나 되었을까. 예수님과 나이가 어느 정도 차이가 나는지에 대해
성서에서 말씀은 없다.
남편이 될 요셉과 마리아는 약혼 상태이었고 마리아는 결혼을 앞둔 혼기에 적당한 나이를
추정해 보면, 당시 풍습에 따라 열셋이나 열넷 정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이 계시해
주지 않으면 마리아께서 쉽게 감당해 내기 어려운 나이인 것이다. 이렇듯이 성서 어디에도
이런 상황이 어렵게 만들었다는 얘기 없음은 신의 초월성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틀림없는
것이다.
하지만 "아들을 출산할 것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천사 가브리엘이 낳을 아이의
이름까지 지어 주신다. 그때에 팔레스타인 중동 지역에는 '예수'라는 이름은 아주 흔했었
다. '영희'나 '철수'와 같이 유대인들에게는 익숙하고 가장 많은 이름이 ‘예수’였다. '예수'
이름의 의미는 '하느님께서 즉각 구원함'의 의미를 가지고 있어 시대적으로 유행하던 이름
이다.

구약성서는 거의 전부가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다. 바빌론 시대에 포로로 오랜 세월 보내
면서 유대인들의 국어가 변경되었다. 예수님 시절에 히브리어는 성서를 알려고 하는 율법학
자들만이 공부하는 언어 학문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엄청나게 많이 흘러 이스라엘이 1948년 건국하던 때에 히브리어는 유대인들
의 공통 국어로 됐다. 예수님은 유대인으로 출생하시고 이들의 사용하던 아람어와 그리스어
를 사용하였고 예수님께서도 주로 아람어를 쓰시고 가르치셨다. 그때에 이스라엘에서 그리
스어는 통용하는 국어이었고, 이곳의 공통어였다. 그러므로 신약성서는 당초에는 그리스어로
쓰여 졌지만 유대인들은 공통어인 아람어를 계속하여 사용했다.
갈릴리의 일대에서 주위 사람들은 나이어린 예수님께 말을 걸려고 할 때에는 "예수야! 예수
야!"하며 불렀을 것이다. 참으로 정겨운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예수님이 태
어나신 베들레헴은 천주교의 성지로서 ‘House+Bread’ 뜻을 지닌 곳이다. 현재 예수님께
서 태어나신 자리의 마구간은 없어지고 약 1500년 전에 조성된 ‘예수탄생 교회’가 건립
되어 있단다.
529년에 세워진 이 교회는 우리나라 역사를 살펴보면, 남진정책을 추진하던 고구려 안장왕
이 군사를 거느리고 523년에 백제 성왕과 서로 전쟁을 하던 때에 지어진 것이다. 예수탄생
교회는 동방교회라 불리는 정교회의 교회이고 역사상 가장 오랜기간 함께한 교회이다.
교회의 출입구가 세로로 1.2m정도로 머리를 꾸부리지 않고 꼿꼿이 새우고서는 입장할 수
없다. 감히 무뢰하게 말을 타고 입장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출입구를 낮게 축조했다. 순
례객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머리를 조아리고 ‘자아를 내려놓음’ 상태에서 입장이 가능하
다. 여기가 상징적으로 실제 하느님과 최초로 미팅하는 장소일 수도 있다.
계단을 따라 가면 하부에는 큰 스타 표시로 꾸며진 부분이 있고 그 스타 중앙부에 조그마한
유리 창틀이 있다. 보이는 그쪽에 예수가 탄생하신 ‘저기’가 존재합니다. 마루 밑바닥에
무릎을 굽혀 엎드린 상태에서 두눈을 창문에 근접하게 갖다 대어야만 새까만 어둠이 존재함
을 봅니다.

이 세상 모든 피조물들이 그 분을 통해 생겨났으며, 그분이 없이는 생겨난 것은 한개도 없
다. 조그마한 원형 속의 어두움은 요한이 말씀하신 깨닫지 못한 어두움이거나 아님 그것은
태초의 어둠과 동일한 것일까? 천지창조의 근본 터인 이 곳, 여기가 바로 예수님께서 오신
터이다.
예수님은 아우들과 자매들이 있었는가. 민감한 토론거리이나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전혀 얼
토당토 안한 소리이다. 동정녀 마리아께 나신 하느님의 독생자 즉 외아들이신 예수님은 당
연히 형제들이나 자매들이 없이 계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독생자’이신 분께서 다
른 형제나 자매가 존재한다는 가정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마리아가 ‘평생 동정녀’로 처녀인 것이 우리 천주교에는 그대로 녹아 있다. 이슬
람교도들도 천주교와 같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믿으며 코란에 기재되어 있다. 하지
만 이슬람교도들은 예수님의 하느님 외아들 자격에 대하여 하느님께서는 외아들을 필요치
않다고 하여 견해가 우리 천주교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예수님은 본인을 지칭하실 때에 ‘메시아’라고 얘기한 적은 없는 거로 알고 있는데, 메시
아를 대신하여 “인자”라 칭하시고 뜻을 ‘사람의 아들’로 늘 말씀을 하신다. ‘인자’의
풍미와 그 의미가 심오하여 매우 깊다. 히브리어로는 ‘Aben adam ⇒ 아담의 아들’로 풀
어 쓸 수가 있다. 예수님은 본인을 지칭하시여 ‘사람의 아들’이면서, 명확히 ‘아담의 아
들’이라고 늘 말씀하셨다. 왜 일까요.
구약에는 기록되기로 신이신 하느님은 자아의 형상으로 인간을 빚어내었다고 되어있다. 그래
서 사람 모습과 신의 모습이 거의 같을 거라고, 사람의 형상은 신의 형상처럼 생겼을 것으로
다들 그렇게 믿고 있다. 그래서 우린 나이 많으시고 경륜이 많으신 만능의 할아버지 하느님을
그려 놓을 때가 있으니 이 또한 잘못 이해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해외에서 신학을 수학한 차동엽 신부님은 “‘형상’이란 글자에 밑줄을 그어라”고 말하며
‘형상’이란 말씀은 히브리어로 ‘셀렘’이다. 성질의 내용이 거의 같을 때에 사용하는 말
이지, 겉모양이나 모습이 빵틀처럼 똑같은 경우에는 히브리어로 ‘Demut’란 단어로 해석
한다. 그래서 ‘하느님의 모습이나 모양이 아니고 성질을 본 떠 사람을 창조 하였다’는 의미
라는 것이다. 신의 초월적 실체인 하느님을 “사람의 3, 4차원적이고 옹졸한 사고나 판단 속

에 묶는 형태”라고 하겠다.
그럼 예수님은 어디서 오셨으며, 또한 예수님은 돌아가시고 가신 곳은 어디인가? 구약 창
세기를 보면 하느님은 신의 초월성을 갖는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에 최초의 인간 아담 속
에는 신의 성질이 있었다. 예수님은 자기를 가르쳐 “아담의 아들”이라 한 이유도 그렇
다. 아담은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한 자이나 최초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이자, 우리
인류의 시조로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진정한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후
손인 우리 인간들에게도 분명 ‘신의 초월성’을 갖고 태어나는데,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
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한 성인을 보면 확실히 증명이 된다.
죽어, 천당에 가서 편안하게 노닐기 위해 예수님을 믿겠는가? 예수님이 어디에 계셔야 하
겠는가? 바로 ‘내 안’에 거하셔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내가 책을 쓰고
있건만, 과연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고 있는지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가톨릭인들의 삶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내’가 사는 게 아니라 ‘내 속에 그리스도’가 살게 되면 과
연 무엇이 어떻게 바뀔까요? 모든 사고를 그리스도께서 하시고 모든 행동도 그리스도께서
하셔서 마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것처럼 나도 부활한 것 같음을 느끼겠죠. 맘속에서 넘
쳐흐르는 순명감과 환희를 느낄 수 있겠죠. 그건 끝없는 축복과 자유 그리고 사랑임을 알
수가 있겠죠.
예수님의 생각이 나의 생각으로 변하고 그게 내 맘속에 계속 살아있음이라! 참 멋진 삶이
되지 않을까요? 그러나 내가 아직 변하지 않았음으로 착하고 봉사하며 ‘내가 예수님의
생각과 동일하구나’하고 계속 노력하고 살아야지요. 실지로 내 속에 예수님이 거하기만
한다면 내 몸뚱이는 바로 십자가가 서 있는 거룩한 성당이 되는 것이니까요.
“잘 안되는구나“ 하고 느낄 때 바로 나를 풀어주고 나에게서 해방되어 보십시오. 그러
면 시각이 멈춰지고 그 순간 자력으로 살지 않고 세상의 그리스도로 살게 됩니다. 그게
바로 나를 버리고 나의 십자가를 메고 가라는 예수님의 명령으로 볼 수가 있죠.

요한복음 14에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만들려고 먼저 간다.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같이 있게 하겠다.』『나는 길이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
버지께 갈 수 없다.』하셨으니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해 답을 알려주신 것이다.
예수님이 빌립보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보는 것이 바로 아버지를 보
는 것이다.” 존재해 있는 그대로의 말씀일 것이다. 예수님 속에 가득한 ‘하느님의 초월
성’이 바로 자신이시기 때문일 것이다. 아담의 아들 예수님, 단언하건데 그분은 신을 품은
인간이었다.

728x90
반응형
사업자 정보 표시
사업자 등록번호 : -- | TEL : --

'사랑하올 예수님(믿음) > 믿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자신이 우상이다.  (0) 2023.01.22
하늘나라가 그곳에 있다.  (0) 2023.01.22
들보 뽑는법  (0) 2023.01.22
13사도  (0) 2023.01.22
그리스도께서 내 맘 속에 산다.  (0) 2023.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