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전 이스라엘에서 계셨던 예수님은 당초에는‘그저 그런 평범한 인물’이었다. 유대
인들의 눈에는 예수님을 ‘나사렛에 사는 촌놈’정도로 여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실지로
처음에는 예수님은 그저 시골에서 자란 촌뜨기 목수 요셉의 아들이었다.
예수님은 수천 년간 내려오는 유대법을 제멋대로 지키지도 않고, 유대인들이 우리의 ‘화냥
년’정도로 여기던 사마리아 사람들과 같이 어울리고, 몸을 파는 매춘부나 간음하는 여인들
을 보살피는데 앞장만 섰으니 참 한심하기가 그지없었겠죠. 실지적으로 ‘들보가 박힌
눈’으로 보는 유대인들 입장에게는 충분히 그럴 가능성도 있는 말이다.
예수님이 사시던 시절에도 ‘메시아’라고 자청하는 자들이 많았나 봅니다. 자기가 남의 눈
에서 ‘티끌을 뽑아주겠노라’라는 자들이 있었으니 예수님의 눈에 비친 이 모습은 얼마나
바보들의 극치이었을까? 자기 눈에 큼직한 들보가 박혀 엉터리 세상을 보는데 남의 눈에서
티끌을 뽑으려들다니.
우리들도 크나큰 들보가 박힌 눈을 가지고 그냥 뽑지 않고 살아가지나 않나 싶네요? 예수
님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고 확실함이 있어 한 푼을 더하거나 빼는 경우가 없습니다. 그래
서 성서를 볼 때마다 가슴이 탁 막혀 와서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죠.
“어떻게‘형제 눈 속의 그 작은 티끌을 빼주겠다’ 하느냐? 자기 눈 속에 박힌 큰 들보는
못 보면서, 너희 눈에서 큰 들보를 빼내어야 안목이 잘 보이게 되어 형제의 눈 속에 있는
작은 티끌을 빼 줄 수 있지 않겠느냐?”(루가 6/41~42)
그러면 우리들의 안목에 박혀있는 그 큰 들보를 어떻게 하면 뽑을 수가 있을까요? 해답은
바로 성서 속에 있을 것으로 보고 찾아봅니다. 들보의 이야기는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
시대까지 올라가야 하지 않을까요? 처음으로 안목에 들보가 박혀 세상을 삐딱하게 보여 지
는 때인 것 같다. 선악과의 과일을 따서 먹음으로서 우리들의 행위를 선과 악으로 구별하면
서부터일 것이다.
그럼 우리 안구에 박혀있는 들보를 뺄 예수님의 비책은 과연 무엇일까요? ”자기 십자가를 지
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마태오 10/38) “십자가를 지고 나
를 따라오지 않는다면 내 제자가 될 자격이 없다.”(루가 14/27) 누차 계속 말씀하시고 계신다.
자기 십자가를 져보고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야 우리 안목에 박힌 들보를 뺄 수가 있다는 것이
다. 그렇지 못하면 “나의 제자가 아니다”라고 강력하게 말씀하고 계신다.
또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
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사랑하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라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인 “서로 사랑하여라!”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눈에 박힌
들보를 확실하게 빼내는 방책은 우선 내 십자가를 지고서 서로 사랑하게 되면 확실한 처방이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을 추종하거나 따르려는 사람들은 인생이 ‘예수님의 제자’로 여겨지길 제일로 원할
것이다. 주일을 거룩하게 보내고, 성당으로 가 미사를 보고, 교무금을 내고, 식사할 때마다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그런데 예수는 이런 보편타당한 일보다 더욱 중요한 일들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자는 내 제자가 될 자격이 없
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내 제자임을 알게 될 것이다”
자신의 위치를 낮추어 죽이게 되면 보는 안목도 즉시 죽게 된다. 자신을 죽이고 서로 사랑
하며 회개하는 삶을 살 때 즉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사랑의 생활을 할 때, 들보가 망가져
뽑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십자가’를 고통으로 알고 ‘십자가=박해(고
통)’등식이라고 사고한다. 그건 십자가의 실체를 잘 알지 못하여 우리들이 꾸며낸 착시의
등식인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 필립보가 “주님, 아버지를 뵈옵게 해 주시오면 더 바랄 것들이 있겠습니
까?”라며 예수님께 간곡히 요청하셨다. 이유인 즉 필립보의 육안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
일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대답을 하셨다.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요한복음 14/8-9)
필립보의 안목으로는 볼 수가 없었다. 나의 눈앞에 보이시는 예수님을 눈을 씻고 봐도 예수
님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의 눈에 잘 보이나 하느님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필립보의 안목에는 큰 들보가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안목은 우리들과 크게 달라
서, 하느님이 잘 보이시는 원인이 눈에 들보가 박혀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서 그분 속에 잠재해 있는 ‘신의 초월성’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신
의 초월성’대문에‘자기 십자가’의 실체가 드러나는데 그것은 모진 고통이나 박해가 아니
라는 것이다. 우리들의 인생살이 속에서 신의 초월성을 관찰할 수 있게 하는 눈이 필요한 것
이다. 그 안목으로 들어오는 길의 이정표가 ‘자기 십자가’이다.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가 14/27)고 말씀의 사유가 명백해집니다. ‘예수님의 안
목’을 찾아 가지는 자가 예수님의 애제자다. ‘우리들의 사랑’ ‘자기 십자가’는 들보
를 뽑지 않고는 접근할 수가 없고 들보를 빼면 전부가 보이고 그렇게 행동도 하게 될 것이
다. 그래서 제 눈에 들보를 뽑으려면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며 우리들이 서로 사랑하여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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