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반암(bedrock)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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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올 예수님(믿음)/믿음

하느님 집에서 월세로 사는 것이 영성이다

고지중해 2021. 4. 18.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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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도성 안에 있고, 둥근 황금빛의 지붕으로 지어진 올리브 산 위 성전은 이슬람인의 성전이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이집트를 탈출한 유대인들이 우선 천막으로 성막을 치고 그 안 중앙에 십계명을 새긴 석판을 설치해 놓아둔 성전이 있었을 것이다.

 

여기가 바로 하느님과 대면하고 만나는 장소인 것이다. 이렇게 가나안 땅으로 들어온 후 나라를 세우고 성을 쌓고 성전을 축조했을 것이다. 유대사회의 중심이자 핵심 장소였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예루살렘으로 제자들과 함께 와서 아무도 올라탄 적이 없는 어린 나귀에 오르시어 초라한 모습 그대로 낮추어서 들어 가셨다. 당당하고 위엄스럽게 멋진 말을 타시지 않고 겸손과 보통의 상징인 어린 나귀를 타신 예수님은 무한히 낮추신 신의 모습이었다.

 

제자들과 몇몇 추종하는 자들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뻐하며 축하를 드리기 위해 자기들의 웃옷을 벗어 길바닥 위에 깔았으며, 수많은 군중도 같은 이유로 겉옷을 길 위에 깔은 것으로 성서에는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죽음과 삶의 올리브산 고개이자 십자가의 죽음을 맞으시는 최후의 예루살렘 입성이다.

 

올리브 산 중턱 겟세마니에서 예수님의 기도 중에 하신 말씀은 우리들이 맘속에서 기준이 되어 마음속에 새겨야할 말씀이 하나있지요. ‘나의 뜻대로는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인간의 삶과 주검사이에는 있는 엄청난 낭떠러지로 우리들의 영원한 과제이자 풀이지 않는 난제다. 이런 관계의 낭떠러지에 교량을 건설하고자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신 것이다.

 

유대인들의 심장 예루살렘에는 제물로 바치게 될 비둘기의 장사꾼들이 늘 북적거렸는데 하늘로 올리는 제물들로 원래는 이랬다. 유대인들은 유목민으로서 재산 1호였던 소나 염소의 새끼들 중에 첫째를 자신에게 떼어내 하느님께로 바쳤으나 예수님 당시에는 크게 변질되었다는 것이죠.

 

당초에는 이런 아끼던 제물의 피를 흘리고 그 피가 불 위에서 타는 것을 느끼고 보면서, 그리고 아끼던 제물의 죽음을 통하여서 자아의 죽음에 관해 생각하며 눈물로 회개하면서 자아의 모습을 깨끗이 하는 그런 참된 용서를 구하지는 않았을까요?

 

이런 참된 용서를 구하면서 자아를 씻는 경우가 바로 하느님과 인간과의 만남의 장이 마련된 것이다. 만남의 장에서 소통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초월성안으로 걸어갈 수 있게 된다. 예수님께서 보시게 된 성전 앞 비둘기 상거래는 일종의 거래행동으로 보신 것이다. 돈을 주고 산 제물을 바친 댓가로 신께 보답을 요구하는 한심한 상거래 행위로 변질된 것이다.

 

예수님은 나의 집은 기도 집이라고 불리 울 것이다라면서 비둘기 장사꾼의 판을 의자로 엎어 버리셨다. 하느님께로 바치고 나를 씻는 제물로서 자아가 자꾸만 작아 없어지는 그런 제물이 기꺼이 받아 주시는제물이 아닐까? 하지만 당시에 성전은 하느님을 핑계로 돈벌이를 하는 상인들의 집단으로 되어버린 것이다.

 

예수님이 지금 우리에게로 오신다면 예루살렘을 어떻게 평가를 해 주실 건가? 당시에 성전은 없어지고 곳곳에 축조된 성당이나 교회를 과연 기도의 집으로 평가해 주실 건가? 종교를 통해 율법주의자 믿음은 보다 강해지고 신앙이 더욱더 두터워진다. 이럴 때에 우리의 고집은 더욱 강해지고 자아의 틀이 확고해져서 예수님께로 나아갈 수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우리 맘속에서 사시게 하는 것은 이런 종교성이 아니고 영성인 것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로 와서 정체성에 대하여 묻는 구절이 나온다. ‘당신은 이 일을 무슨 권한으로 하는 것이요? 대체 누구에게서 그런 권한을 왔단 말이요?’ 하지만 예수님은 가르침대로 질문을 피해 가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온 것이냐? 하늘이냐, 사람이냐.’ 이렇게 질문을 던지자 진퇴양단에 빠진 유대인들은 모르겠소.’라며 답한다. 그러자 예수님도 명쾌하게 그럼 나도 얘기하지 않겠소.’라며 질문에서 빠져 나오신다. 이런 예수님을 재치나 능력을 평가할 때에는 바로 안목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물의 원리를 꽤 뚫은 눈 즉 신의 초월성을 품은 안목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실 예수님도 율법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계셨으나, 보다 더 중요한 걸로 율법의 근본정신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죽여라라고 된 모세의 율법에 따라 바리사이인들이 간음한 여자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와서는 이 여인을 돌로 칠 까요라고 묻자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돌로 쳐라라고 하신다. 율법학자 같으면 여인을 죽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자격이나 권리를 논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논쟁 대상이 아닙니다. 단지 주님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서 있는 여인을 보시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죄에 대한 양심에 가책을 받아 예수님을 떠나갔지만 여인은 죄의 대가를 받기 위해 그 자리에 남아 서있습니다. 그녀는 세상을 심판하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고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구세주 앞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정신보다 무한하시고 끝없는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의 율법을 완성하시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권위가 있었다.’고 성서는 쓰여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성이 내 속에서 흘러갈 때에 권위는 저절로 살아납니다. 하느님과 소통하는 사람은 권위에도 갇히지 않고 행동이 자유스럽게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여 본질을 보지 못하게 되면 대체로 위선자고집이 아주 센 고집불통 자가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4/14과 같이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다라 하셨다.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8/32)

 

하늘나라에 바람이 부지 않는 날은 없어서 항상 바람은 분다. 내 배에 돛을 달아 하늘로 가서, 넓은 하늘을 배경삼아 가만히 묵상을 해 보자. 하느님을 소유하는 이에게는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으므로 오직 하느님과의 동거를 위해 하느님 댁에 월세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얼마나 축복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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