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에 모세가 유대인들을 데리고서 이집트 땅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인 가나안으로 왔다. 하지만 현재의 예루살렘이 정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가? 중동지역은 적어도 가나안 땅이 아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낙원이자, 약속의 땅인 젖과 굴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찾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는 그들은 벌써 그 땅으로 와 있는데도 말이다.
이제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시게 되는 마지막 일주일이 시작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유월절이 다가 왔으므로 분위기가 들떠 있을 쯤에 예수님은 예루살렘 도성 안으로 걸어가신다. 시각의 강물은 과거, 현재와 미래를 흘러가는데, 예수님께서는 ‘신의 초월성’을 밑바탕에서 하나의 약속된 일인 것을 다 알고 계셨다.
정오쯤에 우물가에서 우연히 마주친 사마리아 여인께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우리들 몸속에서 샘으로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고 하셨다. ‘신의 초월성’에 근거한 예수님의 물은 샘의 물로 늘 솟아나야 함에 따라, 자기 자아가 뚫어져 구멍이 생겨 날 때에 물이 솟아날 것이다. 자아에 구멍을 내고서 샘솟는 샘물은 예수님의 영원한 생명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이집트 땅에서 태어난 첫째로 태어난 모든 것은 죽음을 당할 것이다. 하지만 문짝 틀에 어린양 피를 바르면 죽음은 비켜간다고 얘기하신다. 유대인들은 모두가 이를 실행하여 죽음을 면하였으나 이집트인들은 그대로 죽임을 당하였다.
그날을 유대인들은 ‘파스카(유월절)’ 라고 부른다. 유대인들이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을 맛보게 되는 사건인 것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도성으로 가실 때에도 유월절을 며칠 앞둔 때였다. 양력으로 견주어 볼 때에 대충 4월 어느 날쯤 될 것을 보인다.
각 집안마다 약 1년 쯤 자란 어린 숫양을 잡아 준비한다. 또는 어린 숫양이 없거나 경제적으로 다소 부담이 되면 어린 염소를 바치기도 했다. 14일 저녁까지 잡은 양의 피를 우슬초라는 식물 풀에 묻혀 문짝 틀에 발랐다. 또한 잡은 양고기는 구워서 먹지 삶아서는 먹지 않는 풍습도 있었다.
이런 유월절의 풍습에는 주검을 회피하고자하는 인간의 소망이 함께하지 않나 생각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걸어 나오실 때에, 여기에 있는 웅장한 성전 건축물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허물어지고 없어 질것이다(마태오24/1)고 말씀하신다. 유대인들에게는 하느님과 만나는 장소인 신성한 성전에 대하여 무시한 말씀이다.
유대인들은 예전에 성전이었던 곳인 통곡의 벽에 앞에 서서 기도를 해야 하느님께 급행으로 전달된다고 믿고 있다. 현재에도 하느님과 만나는 곳을 성전이라고 믿고 있는데 이런 성전이 허물어진다고 하니, 참으로 신성 모독하는 말씀인 것이다.
사실 예루살렘 성전은 헤롯 왕이 기원전 20년에 왕권의 권위를 위해 복원한 것으로 예수님 사후 로마세력에 대항하는 반란이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는데 로마의 공격으로 성과 성전은 함락되고 로마인들의 피비린내 나는 잔인한 살육이 저질러졌다.
성전의 주된 구성물질은 주로 돌들의 구조체이고 세월이 흘러가면 허물어지게 마련이나 다시금 축조하여 세우면 되나, 현재에 예수님의 말씀처럼 무너진 잔해만이 존치해 있다는 예수님의 지적은 과연 무엇일까요?
하느님과 만나는 장소로 진정한 성전에서만 과연 만날 수가 있는 것일까? 하느님과 만나는 장소가 내 맘속이 되면 어떨까? 그러므로 우리 맘속은 하느님께 기도드리는 나만의 작은 성전으로는 될 수가 없는 걸까요?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가장 큰 계명은 무엇인지를 물었다. 예수님은 ‘첫째가 하느님을 사랑하라, 둘째가 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 라고 대답하셨다. 유대인들의 그 많은 계명 가운데에 이렇게 둘을 뽑은 이유가 내 맘을 다하고 내 생명을 다하고 내 영혼을 다하고 나면 그곳에는 내 자아는 다해 없어지고 오로지 하느님 한분만 남는다.
내 가까이 있는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단지 가까운 이웃에 사는 사람들을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여기에도 자아와 이웃은 둘이 아니고 하나로 된다.
유대력으로 12일이어서 유월절을 이틀 앞두고 있었음으로 예수님께서는 시간이 많지 않으셨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이제 이틀 후면 파스카임에 따라 사람의 아들은 십자가 못 박혀 죽을 것이다’라고 예언을 하신다.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저녁식사를 함께하는데 이것이 최후의 만찬입니다.
마지막으로 하고픈 말씀이 ‘이 빵과 포도주는 나의 살이요, 나의 피다’라고 하십니다. 식사를 같이 하면 우리들은 같은 식구라고 말들을 하지요. 이런 식구들에게 마지막으로 하고픈 얘기가 예수님의 가르침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우리들의 죄를 용서해 주려고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라는 말씀에는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방도가 있습니다. 내 살을 변화시키고 내 피를 변화시키면 나의 성품을 바꾸는 길이다. 내 살이 예수님의 살이 되고 내피가 예수님의 피로 되면 예수님의 품성이 내 품성으로 되게 마련이다. 그래서 ‘이제부터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산다.’라고 바오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서에 관해 좀 안다는 사람들에게 ‘성서 중 제일로 은혜로운 구절이 있다면?’이런 물음을 던지면, 즉시 짧은 시간에 흘러나오는 구절이 하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 인간이 자기 믿음을 성서 가운데서 말씀을 찾는 시간이나 늘 항상 생각하고 있는 구절이니까요!
여러분들이 갈라티아서 2/20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다.’를 꼽습니다. 성서는 신․구약 합쳐 방대한 분량이나 하느님의 말씀이 그대로 녹아 있는 갈라디아서 2/20은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이정표’요, 거기에 우리들의 말씀이 숨을 쉬는 터전이라 할 수가 있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복음 14/6)”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죠. 또 “나를 통하지 않고선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고도 했습니다. ‘예수님과 통한다.’건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로 통일된다는 것인데 그렇지 못하면 영원한 생명도 없으며, 우리가 늘 그리는 천국도 없다는 것이죠.
사도 바울로께서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예수가 산다.’고 하셨듯이 내 안의 예수님이 아침밥을 드시고, 내안의 예수님과 함께 일하러 직장에 가야 하죠. 이게 바로 ‘예수님은 내안에서 부활하셔야’ 내가 진정한 그리스도로 살아간다는 것이죠.
예수님은 ‘내가 빵을 적셔 주는 이가 그 사람’이라고 배신을 예고하시면서 유다에게 건네주자 이를 받아먹은 유다는 밖으로 나가버린다. 이때가 해와 하늘이 지고 빛도 지고 예수님 죽음의 그림자도 함께 지고 있었다. 그래서 인간사 가운데 가장 불쌍한 사람은 유다 이스카리옷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최후의 만찬을 마친 후에 유다는 예수를 팔아넘기는데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호수나 바다가 없으면 보트는 떠 있을 수가 없는데 보트가 호수나 바다를 팔아넘기는 일을 왜 했을까? 아마 유다는 바깥세상에 집착하고 자신 내면세계로는 전혀 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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