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나 신앙은 그 옛날이나 지금이나 우리들 사이에 항상 존재해 왔습니
다. 실제로 자연이란 거대한 힘 앞에 무기력한 인간한계를 인식함으로서 전
지전능하신 조물주에게 의탁하고픈 맘이 생기니까요.
각설하고, 내가 가톨릭
교인이 된 이유로 나는 매일 매일 겁에 질려 살았습니다. 모든 일에 겁이
나, 심지어 보이는 것들과 자연에게서도 겁이나 겁에 질려 참 비겁하게 살았
죠. 늘 겁이 없이 사는 게 소원이었는데.
내가 오늘 죽더라도 오늘을 행복하게 살 수 있었으면 싶어 성당을 찾았죠.
자기를 버려 무한대로 낮추어 진공상태로 만들고, 자아를 죽이고서 세상을
직시하십시오. 그러면 세상에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
다. 성서도, 우리 이웃도, 예수님도, 하느님도 다시 보이기 시작하죠. 이렇게
내에게 ‘무언가 있다가 이제는 없다’ 이런 부재감정 때문에 ‘아니스타시
오’로 살게 된 것이죠.
이런 행복한 삶이란 남들에게 친절과 봉사로서 사랑하고 그들과 함께 사랑
하면 되는데, 그래서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처럼 살려
고 예수님께 전적으로 의탁하게 된 것이죠. 내가 살아야 하는 길은 잘 알고
있으나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미완성의 길인 것이죠. 그러나 완성이 될 때에
는 하느님과 함께 일치하는 삶을 살아 순명하며 내적 자유와 기쁨을 누리는
날이 되는 것이죠.
예수님은 한번 오셨다가 홀연히 그렇게 가셨지만 그 분의 생애를 적어 놓은
사실들의 집합체인 ‘성서’는 왜 그렇게 구약에 맞게 쓸려고 했는지, 왜 그
리 부풀려 가장하여 쓸려고 했는지, 그래서 얼마나 답답했는지 모르겠네요(참
조: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그래서 저는 아직도 구약성서를 읽지 않고 있습니다.
‘탁’하여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외아들이 오셨다가 죽으시어 부활하시고
하느님 옆에 계신다고만 하여도 될 것을 . . . (이하 논쟁거리임으로 생략)
사도 바올로께 성령이 계시하시고 그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체험케 하
시어 체험의 수가 쌓이면서 우리는 성서 없이도 착한 천주교인으로 살다가
자연스럽고 후회 없이 행복하게 죽을 수가 있는 거죠.
사실 황혼의 자락에서 교인이 된 천주교인들은 성서를 한번도 안 읽고 죽는
수가 상당할 걸요. 그러므로 믿음에서는 이론이나 체계보다도 느끼는 체험적
인 요소가 우선됨으로 ‘체험 우선’인 셈이죠.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너는 왜 공부를 하지? 너는 커서 무엇이 될까? 물음이
그냥 스치는 질문이 아닐 때에는 골몰히 생각하게만 만들어 줍니다. 아이는
스스로 답을 알아내게 만들면, 사고의 근육을 형성시켜 ‘나의 희망이나 꿈
을 이루기 위하여’라고 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아이들은 자기가 공부하는
이유를 알게 되는 것이죠. 이렇듯 ‘왜’는 자기 맘에 씨앗을 심기 때문에
싹이 나, 자라서 희망을 이루게 되고 그 희망에는 뿌리가 있습니다.
이렇듯 다른 종교의 뿌리를 찾아 샘물을 마셔 봄으로서 그리스도교의 본질과
더욱 밀착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불교신자를 업신여기지 않고 불교를 존중하는
것이 우리들을 믿음을 더 풍요롭게 만듭니다. 옛날에 양반이 양반 역할을 제대
로 하려면 상대방 사람의 족보를 먼저 알아주어야, 상대도 우리집안 족보를 알
게 되고 우리집안이 양반 집안이라고 얘기합니다.
상대의 우물을 마셔보고, 상대가 우리 샘물을 먹어 본 다음에 ‘그리스도교의
샘물 맛이 일품이다’라고 합니다. 진짜로 그리스도교의 샘물 맛을 알려면 맘속
깊이 신비를 체험할 때에 우리를 자유롭고 기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의 일상생활이 마음의 평화를 찾는 도(道)의 시간이라는 것인데요, 내
가 발을 딛고 서 있는 곳, 갖가지 스트레스가 일상으로 된 곳이 우리가 살아
가며 수행하는 곳입니다. 우리는 네잎의 클로버를 찾느라고 세잎의 클로버를
잊어버려 ‘일상의 로또복권’를 놓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수도원의 수도승
이 그리스도와의 대면을 얼마나 고대하는 일이겠습니까 마는, 본 기적을 깨
닫는 일은 세잎 클로버를 통해 온다는 사실을 알까요.
우리는 무언가 특별한 일들을 우리 주위에서 찾으려고 하지 않고 적막한 산중의
절, 높은 산자락의 기도원 등 특별한 곳에서 찾으려는데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
지 생각해야 합니다. 생활에서 그리스도를 찾으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상대방
의 눈에서 그리스도를 찾고 장애인들이 곧 그리스도로 알고 얼싸안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이웃을 위해 열심히 헌신활동을 했더라도 그게 나를 드러내기
위한 행위였다면 그건 무의미한 행위입니다. 이렇듯이 요즘 나의마음공부는 나를
드러내는 것에서 탈피하고 내가 누구인지 뒤돌아보는 학습을 하는 중입니다.
우리가 이슬람교에도 배울 것이 있다면 그것은 헌금을 이웃의 가난한 이를 위해 직접
주어도 헌금을 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인데요, 그 이유는 예수님께선 신앙을
위하여 우리들에게 오신 것이 아니고 우리들의 행복한 삶을 영위해 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대부분이 맘이 아픈 사람들, 맘이 병든 사람들이
치료하기 위해 성당을 찾는것으로 아는데, 우리 죄를 솔직히 고해할 때 우리는
자유스럽게 된다. 즉 죄인이 본인이라고 솔직히 시인하여야 진정한 그리스도교
신앙인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재물을 같이 섬길 수가 없다’고 하셨는데,
바로 내가 돈과 성공을 축적하고 난 뒤 아파트, 외제차와 부유층의 아내와 결혼
했는걸 깨닫는 것이다.나는 내 마음속에는 사랑이 풍부하고 그리고 착하다고 생각했으나
내가 교활한 자였구나, 처절하게 깨우치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인격이라는 가면을 쓴
채로 상대방과 만나기 때문에 자기의 본 모습은 볼 수가 없기 때문인 것이죠.
우리 모두는 살아서는 돈 많은 갑부로 살도록 부귀영화를 위해 기도하고, 죽
어서는 천당을 꿈꾸니 하느님 입장에서 볼 때, 참 암담해하시고 난감해 하시
지 않나 싶습니다. 늘 베풀고 살아서 가난해야 천당 문을 열어줄 수 있다는
데 우리의 욕망들은 그 끝이 없으니 무슨 얘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회개하
고 가진 것을 다 놓아야, 천당의 쪽 창문이라도 열어줄 수가 있다고 하시는
데... 참 난감한 형국이죠???
‘자아’란 개념에는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을 더한 자기애(自己愛)의 뜻이 있고,
인간들에게는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 더 나아가는 경향이 있죠. 사람들은 이런
자기사랑을 포기하는 것은 절대로 안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늘 함께 붙잡아 같
이 행동하며 잃기를 굉장히 두려워합니다. 이런 자아를 한번이라도 넘어서게 되
면 거기에는 깨우침의 존재가 나타나고, 그때부터는 하느님과 일치하는 삶을 영
위할 수가 있어 하느님의 축복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죠. 이로서 완전한 하느님
의 자녀로서 살게 되어 신심 깊은 순명, 내적 자유와 완전한 기쁨을 누리게 되
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마더 테레사 수녀님도 깨우침의 상태에서 예수님과 맞대면한 경험이 있
는 것으로 보입니다. 인간인지라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아상태로 다시 돌아감으로서
번민되어 ‘하느님의 부름에 맹종한 저는 진정 실수를 한 것일까요’라는
말씀을 하신다. 수녀님과 예수님과의 사이에서 그 간격이 좁혀졌다가 넓어졌다
가하는 신의 현존을 고민한 말인 것 같습니다.
도저히 구할 수가 없는 리더를 역사 속에서 찾으면, 바로 ‘영웅 이순신’이
뽑히지 않을까요?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을 격퇴시킨 것도 대단한 영웅이
지만 그것 보다 더 큰 것은 자신을 내려놓는 즉 ‘끝없이 본인을 낮추고, 본
인을 버리고 부하들을 안는’ 리더십을 보여주신 지도자이니까요. 영웅님이
다시 수군통제사로 부임되어 왔을 때에 바로 바다로 가지 않고, 육지로 가
바다 위에서 먹고 살 부식과 부하수군들을 먼저 다독거려 그들의 맘을 먼저
돌려놓은 후에 바다로 갔다는군요.
상대와 내가 마음이 하나 되기는 진정 어려우니 내 맘을 없애면 됩니다. 133
척의 왜군 앞에서 우리 수군들의 맘을 어떻게 하나 되게 할 수가 있겠습니
까? 이순신의 리더십 하에 각자의 맘을 죽이고 모두가 하나 되는 큰 일심(一
心)이면 133척의 왜군을 쳐부수는데 제일 무서운 무기로 돌변한 것입니다.
이런 일심으로 사람을 품은 리더십을 보여주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장애
인들이 곧 그리스도로 알고 품에 안는 다는 것입니다. 이런 향기나는 사람은
되지 못하더라도 향기를 품은 사람쯤은 되어야 되는데. 맘이 가난하여 자기
를 낮추고 상대를 내보다 더 올리는 겸손으로 마음이 깨끗하여 일상생활을
지나게 되면 언젠가는 주님과 대면할 수가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현재의 내가 사는 세계는 전혀 바뀌지 않고 여전히 지구는 태양을 주위로
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벌써 “예수님을 따라” 바뀌었어야 했고, 내
주위의 사람들도 하나 둘 바뀌고 있습니다. 훗날 내가 만날 또 다른 작은 겨
자 씨앗들도 예수님을 따라 갈 것으로 믿기 때문에 그리고 언젠가는 당신을
만나는 것을 기대하기 때문에 이 글을 올립니다.
---- 잘 보셨으면 "좋아요" 부탁해요? 010-3816-1998. 감사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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