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는 가는 그 길은 어떨까요? 답은 행복은 전혀 없는 고행과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 자체가 모순처럼 얘기되지만 사랑이란 실체가 고통스럽고 아픈 것입니다. 노래 가사처럼 사랑으로 인하여 울어보지 못했다면 아직도 사랑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특별하게 사랑하셨던 예레미야는 위대한 예언자였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생애는 박해와 고난 속에서 몸부림쳐야만 했던 매우 불우한 예언자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꾐에 빠져 자기는 신세를 망쳤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앙 안에 위대한 인생은 이처럼 모순처럼 드러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은 가는 길이 험난하기가 짝이 없을 정도입니다. 예수님과 성모님도 그랬으며 한결같이 모든 성인 성녀들이 피와 눈물의 고난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불가에서는 전 생애에 지은 죄가 많은 탓이라고 하지만 그리스도교 안에서는 위대한 사람들이 걷는 축복 받은 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기는 대단히 어렵기만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당신이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 사람들에게 잡혀 고난을 받다가 죽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아주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생각하던 메시아는 아주 강력한 능력을 가지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메시아일 것으로 철석같이 믿었던 예수님이 어리석은 인간으로부터 고난을 받다가 죽는다는 말씀을 하시자 그들은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때에 베드로는 절대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펄쩍 뛰면서 거부합니다. 베드로는 좀 전까지 예수님의 칭찬을 받던 위대하신 인물이었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하늘나라의 열쇠까지도 받은 신임 받은 제자였습니다. 그래서 우쭐했던 그였기에 주님께서 고난을 받아 죽으신다고 하시자 자기가 예수님을 구해 드릴 수 있는 것처럼 나서는 것처럼 보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 물음은 2000년전 예수님께서 당시의 제자들에게만 물어보는 질문이 아니고 현재의 우리들에게 물으시는 질문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을 누구시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느님 고상을 만들어 놓고 늘 소원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리들이 원하는 것에 꼭 맞는 결과물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을 믿는 것, 그리고 그 상황에서 벗어나면 원망하는 것은 우상의 하느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모습을 그려놓았다면 신앙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실망감을 갖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공생활, 죽음, 부활로 이어지는 그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부활’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바로 ‘부활’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부활하셨기에 그분이 우리를 부활시킨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그냥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의 희생과 죽음이 함께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교인들은 십자가를 지고서 주님을 따르려고 노력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아니라 너를 빛내려고 숨은 노력과 봉사와 희생을 많이 합니다. 기도를 드릴 때에 고통이나 시련 없이 행복하게 해 달라고 하면 기도한다면 하느님께서 ‘오냐’ 하시겠습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베드로는 여기서 충격을 받습니다. '사탄'이라는 말은 '반대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우리를 하느님의 뜻에서 빗나가게 하려는 세력, 하느님께로 등 돌린 인간의 빗나간 야망 등이 바로 사탄입니다.
따라서 사탄은 의외로 주님의 가까운 측근에서 쉽게 나올 수 있습니다. 옛날 루치펠도 하느님의 가장 가까운 천사였지만 결국 하느님과 같아지려고 하다 사탄의 두목이 되었고, 베드로도 주님의 가장 사랑받는 제자였지만 결국 사탄으로 전락되는 경우가 바로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를 드릴 때에 행복하게 해 달라는 것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열심히 사는 자들은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그들은 자기들도 모르게 예수님을 반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대자는 가까운 곳에서 쉽게 나옵니다. 매우 아이러니컬한 일이지만 그것도 사랑을 많이 받던 자들이 결국 배신을 합니다.
시련과 고난은 피해야 하고 이겨내야 합니다. 그들은 그 자체로 악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주 악에서 선을 일으키고 탈바꿈 하시기를 원하시며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서 당신께 다가서기를 고대하시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생활을 한다면 그는 분명 사탄인 것입니다. 고통 속에 담긴 하느님의 크신 뜻은 모르고 행복함 안에 담겨진 인간의 뜻만 고집하는 자는 어리석은 사탄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불필요한 눈물을 흘리게 하지는 않습니다. 고통과 시련이 많고 억울해 하는 사연이 많은 것은 크신 사랑이 다가오는 청신호로 보면 됩니다. 받을 사랑이 크기 때문에, 얻을 은총이 크기 때문에 십자가를 짊어지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여러분의 십자가는 무엇이며 팔자가 사납다고 한탄하신 내용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 아픈 현실이 하느님의 사랑의 크신 증거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는 가는 그 길은 어떨까요? 답은 행복은 전혀 없는 고행과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 자체가 모순처럼 얘기되지만 사랑이란 실체가 고통스럽고 아픈 것입니다. 노래 가사처럼 사랑으로 인하여 울어보지 못했다면 아직도 사랑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특별하게 사랑하셨던 예레미야는 위대한 예언자였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생애는 박해와 고난 속에서 몸부림쳐야만 했던 매우 불우한 예언자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꾐에 빠져 자기는 신세를 망쳤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앙 안에 위대한 인생은 이처럼 모순처럼 드러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은 가는 길이 험난하기가 짝이 없을 정도입니다. 예수님과 성모님도 그랬으며 한결같이 모든 성인 성녀들이 피와 눈물의 고난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불가에서는 전 생애에 지은 죄가 많은 탓이라고 하지만 그리스도교 안에서는 위대한 사람들이 걷는 축복 받은 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기는 대단히 어렵기만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당신이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 사람들에게 잡혀 고난을 받다가 죽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아주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생각하던 메시아는 아주 강력한 능력을 가지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메시아일 것으로 철석같이 믿었던 예수님이 어리석은 인간으로부터 고난을 받다가 죽는다는 말씀을 하시자 그들은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때에 베드로는 절대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펄쩍 뛰면서 거부합니다. 베드로는 좀 전까지 예수님의 칭찬을 받던 위대하신 인물이었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하늘나라의 열쇠까지도 받은 신임 받은 제자였습니다. 그래서 우쭐했던 그였기에 주님께서 고난을 받아 죽으신다고 하시자 자기가 예수님을 구해 드릴 수 있는 것처럼 나서는 것처럼 보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 물음은 2000년전 예수님께서 당시의 제자들에게만 물어보는 질문이 아니고 현재의 우리들에게 물으시는 질문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을 누구시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느님 고상을 만들어 놓고 늘 소원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리들이 원하는 것에 꼭 맞는 결과물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을 믿는 것, 그리고 그 상황에서 벗어나면 원망하는 것은 우상의 하느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모습을 그려놓았다면 신앙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실망감을 갖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공생활, 죽음, 부활로 이어지는 그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부활’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바로 ‘부활’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부활하셨기에 그분이 우리를 부활시킨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그냥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의 희생과 죽음이 함께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교인들은 십자가를 지고서 주님을 따르려고 노력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아니라 너를 빛내려고 숨은 노력과 봉사와 희생을 많이 합니다. 기도를 드릴 때에 고통이나 시련 없이 행복하게 해 달라고 하면 기도한다면 하느님께서 ‘오냐’ 하시겠습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베드로는 여기서 충격을 받습니다. '사탄'이라는 말은 '반대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우리를 하느님의 뜻에서 빗나가게 하려는 세력, 하느님께로 등 돌린 인간의 빗나간 야망 등이 바로 사탄입니다.
따라서 사탄은 의외로 주님의 가까운 측근에서 쉽게 나올 수 있습니다. 옛날 루치펠도 하느님의 가장 가까운 천사였지만 결국 하느님과 같아지려고 하다 사탄의 두목이 되었고, 베드로도 주님의 가장 사랑받는 제자였지만 결국 사탄으로 전락되는 경우가 바로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를 드릴 때에 행복하게 해 달라는 것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열심히 사는 자들은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그들은 자기들도 모르게 예수님을 반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대자는 가까운 곳에서 쉽게 나옵니다. 매우 아이러니컬한 일이지만 그것도 사랑을 많이 받던 자들이 결국 배신을 합니다.
시련과 고난은 피해야 하고 이겨내야 합니다. 그들은 그 자체로 악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주 악에서 선을 일으키고 탈바꿈 하시기를 원하시며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서 당신께 다가서기를 고대하시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생활을 한다면 그는 분명 사탄인 것입니다. 고통 속에 담긴 하느님의 크신 뜻은 모르고 행복함 안에 담겨진 인간의 뜻만 고집하는 자는 어리석은 사탄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불필요한 눈물을 흘리게 하지는 않습니다. 고통과 시련이 많고 억울해 하는 사연이 많은 것은 크신 사랑이 다가오는 청신호로 보면 됩니다. 받을 사랑이 크기 때문에, 얻을 은총이 크기 때문에 십자가를 짊어지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여러분의 십자가는 무엇이며 팔자가 사납다고 한탄하신 내용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 아픈 현실이 하느님의 사랑의 크신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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