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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올 예수님(믿음)/믿음

13사도

고지중해 2023. 1. 22.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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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의 콘스탄틴 대제 어머니 헬레나는 소아시아의 드레파눔에서 250년경 태어난 것이
확실하다. 그녀는 270년경에 로마의 장군인 콘스탄씨우스 클로루스를 만났는데, 그녀의 낮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결혼하였다. 그들 사이에 콘스탄틴이 태어났다.
그러나 남편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헬레나와 이혼하고 막시미안의 의붓딸인 테오도라와
결혼하였다. 막시미안이 사망하자, 그의 휘하 군인들이 콘스탄틴을 황제로 모셨고, 그는 그
의 어머니께 아우구스따라는 칭호를 드렸다. 헬레나가 언제 크리스챤이 되었는지는 불확실
하지만, 그녀의 노력으로 밀라노 칙령을 반포케 하여 로마 제국 내에 그리스도교를 인정하
고, 투옥된 모든 신자들을 석방하게 되었다.
그 후에 성녀는 많은 성당을 짓고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었으며 오래동안 성지에서 살았는
데, 설에 의하면 그녀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그녀의 문장은 십
자가이다. 그녀는 아마도 니코메디아에서 사망한 듯 보이며, 콘스탄티노폴에 안장되었다.
로마 제국이 비로소 가톨릭에 자유를 준 것은 저 유명한 콘스탄티노 대제인데, 그때까지
300년 동안 계속된 박해에서 오로지 신앙을 위해 생명을 바친 무수한 신자들의 용감성과
또 그들의 평상시의 훌륭한 행동은 아울러 뜻있는 자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도 남음이 있었
던 것이다.
콘스탄티노 대제의 아버지 콘스탄디오나 어머니 헬레나도 그러한 감화를 받아 은연중 가톨
릭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헬레나는 곧 세례를 받고 후세에 성녀로서의 존
경을 받을만한 훌륭한 신앙의 소유자가 된 것이다.
그녀가 태어난 해는 확실치 않으나 대개 250년 전후로 추측된다. 그녀의 아들인 콘스탄티노
가 274년 2월 17일에 출생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고향은 소아시아의 비치니아 주에 있는
드레파눔이라는 곳이었으며 그녀의 양친은 명문의 집안도 아니고 재산도 넉넉하지 못했으므
로 헬레나도 손수 벌어서 먹고사는 법을 강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본래 미모에다 아름다운 마음씨의 소유자였으므로 마침 그곳에 배속 근부 중
인 로마의 장교 콘스탄티오 클로루스의 눈에 들게 되어 낮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그와 결혼
하게 된 것이다. 그녀가 초산(初産)을 한 곳은 ‘나이수스’라고 하는 지금의 ‘닛슈’ 시
(세르비아 영내에 있다)이며 그 아기의 이름이 곧 콘스탄티노였다.
콘스탄티노는 작은 콘스탄티오라는 뜻이다. 그러는 동안 남편인 콘스탄티오는 차차 승진해
막시미아노 황제의 중신이 되고 부하들의 신망도 컸으므로, 곧 로마 제국 서부의 총독으로
서 갈리아 지방, 즉 프랑스와 남독일, 스페인, 브리타니아 등 온 지방을 통치하게 되었다. 거
기서는 조건이 있었다. 즉 먼저 그의 부인인 헬레나를 버리고 막시미아노의 딸인 테오도라
와 결혼할 것과, 다음은 그 아들인 콘스탄티노를 볼모로서 소아시아의 니코메디아에 있는
리지니오의 저택에 남겨 둔다는 것이었다.
콘스탄티오는 그런 무리한 요구에 처음에는 응하려 하지 않았으나, 그의 복받치는 야심은
마침내 부인을 희생시키려고 결심했다. 때는 292년의 일이었다. 헬레나는 억울한 마음을 억
제하며 비참히 그 자리를 물러났다. 그 아들 콘스탄티노는 인질로서 소아시아를 향해 떠나
게 되어 서로 이별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콘스탄티오는 자기 야망대로 서 로마 지역의 총독
이 되었으나, 역시 사람은 죽을 때엔 본심이 되돌아오는 법이다.
그가 중병에 걸려 눕게 되자 그 아들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아들을 소환하려 했
는데, 이것의 낌새를 알아채린 동 로마의 총독 리지니오는 콘스탄티노를 독살하려 했다. 겨
우 난을 면해 아버지를 찾아간 콘스탄티노는 306년 아버지의 별세와 더불어 군부의 지시를
받아 그 후계 총독이 되었다.
그는 즉시 어머니 헬레나를 독일의 트리엘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 모시고 가서 아버지가 약
탈한 그녀의 지위와 권리를 복구시켜 주었다. 그리고 그가 저 유명한 미르비오교(橋)의 전쟁
에서 대승리를 얻자 곧 서 로마 제국의 황제로서 추대를 받고 로마로 거처를 옮겼다. 그 후
그는 어머니 헬레나에게 왕대비 아우구스타라는 칭호를 보내고 아울러 조폐권(造幣權)을 주
고 어머니 고향인 드레파눔을 개조, 미화해 이를 헬레노폴리스 즉 헬레나의 시(市)라 개칭하
여 영원히 그녀의 이름을 기념케 했다.
그러나 전에 세상의 쓴맛을 다 맛본 헬레나인지라, 연기와 같이 허무한 세상의 영화에 마음

을 붙이지 않았다. 오히려 영원불멸의 행복을 말하는 가톨릭에 더욱 마음이 끌리어 마침내
60세에 이르렀을 때에 자진하여 세례를 받고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초대 교회의 유명한 역
사가인 에우세비오는 그녀를 평해 말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
와 같이 그녀의 신앙은 견고하고 열의는 뛰어났다”고 했다.
당시 헬레나의 몸은 왕대비라는 높은 지위에 있고 또한 조폐권까지 가지고 있어 그녀의 부
유함은 비할 데가 없었으나, 그녀는 빈민에게 희사하거나 성당 건축을 위한 것이라면 한 푼
도 아끼지 않고 모든 원조를 제공했으며, 자기의 존귀한 신분을 잊고 천한 사람들과 함께
예식에 참여도 하고, 기도하기를 좋아했다.
콘스탄티노 황제는 그 후 자기의 기념 도시인 동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콘스탄티노폴리
스, 콘스탄티노의 도시라는 뜻이다)을 그 수도로 정했다. 헬레나는 예수님께서 일생을 지내
신 팔레스티나 지방과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 살게 됨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며, 또한 그녀
의 유일한 소망인 성지 순례를 마침내 326년에 이루었다.
예루살렘을 방문한 황제의 어머니는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신 골고
다 언덕과 부활의 현장, 빈 무덤’을 찾기를 원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은 쉽게 그
장소를 찾아 황제의 어머니를 안내했다. 로마제국이 바로 그 장소 위에 비너스 여신을 위한
신전과 주피터 신상을 세워 놓았기 때문이다. 황제의 명령에 따라 신전과 신당은 말끔히 제
거되고 그 자리에 웅대한 교회가 세워졌다. 이것이 성지 이스라엘에 건축된 첫번째 교회인
‘성묘(聖墓)교회’이다. 그리고 헬레나는 여러 곳을 발굴해 고생 끝에 겨우 주님의 십자가
를 발견하는데 성공했다.
주님이 처형당한 예루살렘의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 위에 걸려있던 <유대의 왕>이라는 죄
명판이 발견되어 그 곳을 집중적으로 발굴해보니 많은 십자가가 발견되었습니다. 헬레나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습니다. 이중에 예수 그리스도가 매달렸던 십자가가 있을까? 나열된 무
수한 십자가에 젊은이의 시신을 올려보았습니다. 그 중 하나에서 젊은이가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헬레나는 그 십자가를 안고 울었습니다. 그 십자가는 지금 로마의 ‘세소리아
대성전’에 보관중입니다.
서기 336년 완공된 성묘교회는 성지 이스라엘의 수난의 역사와 함께 파괴와 재건이 반복되

었다. 현재 남아 있는 성묘교회는 서기 12세기 십자군이 재건한 것이다. 그러나 교회 내부
에는 콘스탄티누스 1세 때 건축된 교회 원형의 편린이 곳곳에 남아 있어 교회의 역사적 무
게를 더해주고 있다. 헬레나는 또다시 주님의 탄생지인 베들레헴과 주님의 승천지인 올리브
동산에 기념 성당을 건축하고 많은 유물을 모시고 콘스탄티노플에 귀환했으나 얼마 후에 주
님의 부르심을 받아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80세였다.
밀라노칙령 (Edictum Mediolanense), 313년 2월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치니우스
(Licinius)가 밀라노에서 회담하고 6월에 발표한 칙령으로 로마제국의 전 영토 내에서 그리
스도교의 자유를 허용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에 따라 박해시대에 몰수되었던 교회
의 재산이 모두 반환되었고, 그리스도 교인을 속박하던 모든 법률은 폐지되었다.
이 칙령은 리치니우스가 막시미누스 다자(Maximinus Daza)를 무찌른 후 오리엔트 총독에게
보내 <박해자의 죽음에 대하여> (De mortibus persecutorum, 348)란 서한 속에 실려 있었
고, 이것이 다시 락탄시오(Lactantius)와 에우세비오(Eusebius)에 의해 인용되어 전해져 내
려오고 있다. 이 때문에 밀라노칙령은 양 황제의 의견차로 인하여 밀라노에서 공포되지 못
하였고, 칙령이라기보다는 동방지역의 총독들에게 보낸 포고문의 형식이었다는 견해가 지배
적이다.(가톨릭대사전 중에서)
콘스탄티누스는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기를 원했지만, 그럴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마지막
까지 세례식을 연기했다. 그가 헬레노폴리스에서 병에 걸린 것은 아마 페르시아 원정을 준
비하던 중으로 추측된다. 치료에 실패하자 그는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려 했지만, 니코메디
아 근처에서 몸져 누울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콘스탄티누스는 세례를 받고, 황제의 자줏빛 옷 대신 세례받는 사람이 입는 하얀
옷을 걸쳤다. 그는 337년 5월 22일 죽었으며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사도교회에 묻혔는데, 무
덤 주위에는 사방에 각각 6개씩 기념물이 늘어서 있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적 과대망상증을
표현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확신, 즉 자신은 사도들의 후계자로서 그리스도교 전파를 위
해 인생과 공직을 바쳤다는 믿음을 표현한 것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후계자들에게 할 일을 많이 남겨놓았지만, 312년에 로마 제국을 그리스도교
국가로 만들기로 결정한 것은 그의 개인적 선택이었다. 유세비우스가 콘스탄티누스의 통치
를 신의 섭리가 실현된 것으로 본 이유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콘스탄티누스가 자신의 역할을

13번째 사도의 역할로 평가한 것도 충분한 의문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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