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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복음서의 재발견과 소명

고지중해 2023. 5. 7.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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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코 복음서의 소명

1. 마르코복음서의 재발견

왜 신약에서 두번째일까? 그만큼 중요해서? 애용된 것이어서? 마르코 복음서가 출현한 1세기에 널리 퍼지고 애용된 건 분명하다. 서로 떨어져있던 마태오와 루카가 이 복음서를 이용했다. 2세기 중반쯤 요한 복음서를 포함해 4대 복음서가 묶일 때 함께 들어갈 정도로 권위를 인정받았다. 그러다가 점차 외면받았다. 초대 교회의 교부들 중에서 마르코 복음서의 주해서를 쓴 이는 거의 없다. (5세기에 안티오키아의 빅토르가 쓴 마르코 복음 해석집이 최초이다)

현존하는 마르코 복음의 최초 주해서는 7세기 아일랜드 수도승의 작품(미카엘 카힐의주장)이거나, 8세기 베다 존자(673~735)의 작품이다.

교부들의 관심은 먼저 제자들이 썼다고 전해진 마태오와 요한 복음서에, 그 다음 루카 복음서에 쏠려 있었다. 실제로 교회의 역사에서 가장 널리 쓰인 성경은 단연 마태오 복음서이다. 교회론의 근거를 가장 풍부하게 제시한 마태오 복음서는 전례와 교리교육에서 기본 복음서로 맏이 노릇을 톡톡히 하였다. 루카와 요한복음서는 각기 독특한 특징을 지녀 그 다음으로 사랑받았다. 가장 짧은 마르코 복음서는 마태오 복음서의 요약본이라는 아우구스티누스(354~430)의 주장에서 나타나듯 덜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나마 마르코 복음서가 살아남은 까닭은 사도 베드로에서 기인하였다는, 그 기원의 사도적 권위가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2. 두 자료설(또는 2출전설, Two-source Hypothesis)

마르코복음서가 가장 먼저 쓰였고, 마태오와 루카가 서로 모르는 상태에서 따로 마르코 복음서를 기초자료로 사용했다는 주장이다. 이 경우 마르코에 없지만 마태오와 루카가 정확히 겹치는 부분은 설명하기 어렵다. 이는 이른바 '예수어록'('자료'는 뜻의 독일어 크벨레 Quelle의 머릿글자인 'Q큐'로 표기. 실존하지 않으나 50년대 예수의 말씀만 기록한 문서가 있었다는 가설)에서 인용하였다고 본다. 즉 마태오와 루카가 마르코 복음서와 큐 문서라는 두 자료를 기초로 작성했다는 것이다. 아래 도표 참조. 이 안에도 마르코가 큐 문서를 알고 인용하였다는 주장, 또는 마태오와 루카가 인용한 마르코 복음서는 현재의 본문 이전의 원 마르코 복음서라는 주장 등 이견이 공존한다.

(마태오와 루카가 각각 고유한 특수 자료를 사용한 것까지 포함하여 두 자료설을 수정한 '네 자료설'로 부르는 이도 있다.)

3. 복음서는 하나의 장르인가?

마르코 복음서의 정식이름은 '마르코에 의한 복음서'(Euangelion Kata Markon)이다. 그런데 이 이름은 2세기에 붙었다. 그렇다면 전에는 어떤 이름으로 통용되었나? 문헌의 주제를 흔히 이름으로 붙이는 그리스 로마문학의 예를 참고하면, 아마도 첫머리에 나오는 '복음'이란 이름이 붙었을 법하지만, 복음은 그 시대에 통용되던 문학양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보편된 선포 내용이었다. 그래서 '복음서'는 그리스도교 안에서 창안된 독창적 문확 장르로 여겼다.(R.J.밀러는 복음이란 이름이 붙은 17개 작품을 소개한다.) 하지만 오늘날 이런 주장은 상당한 이의에 부딪치고 있다.

마르코 복음서도 여느 문헌처럼 청중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쓰였다. 그들에게 어떤 사실을 설명하고 설득하고 확신시키고자 쓰였다면, 그들과 친숙하고 적합한 장르로 접근하는 게 바람직하다. '영웅담(aretalogia)'과 '비망록(appomnẽmoneumata)' 등 여러 의견을 제안하였지만, 가장 가까운 장르로 ‘전기(bios)' 또는 ’생애‘를 꼽는 견해가 많다(C. Buran 책 참조). 전기는 한 위대한 인물의 모범적 삶을 기억하여 교훈으로 제시하려고 그의 출생부터 죽음까지, 특히 공적 생활을 시간 순서에 따라 서사 형태로 소개한 작품이다. 여기에는 사건 뿐 아니라 그가 한 말, 경구, 에피소드 등이 첨가되었다. 분량은 1~2만 단어였으며(대략 마태오 복음서는 18,300, 마르코 복음서는 11,300단어이다), 죽음에 관한 내용이 전체의 15~20% 정도였다(마르코 복음서는 18.4%). 해외 유다교에서는 이런 장르를 이용하여 1세기에 [예언자들의 세계], [모세의 세계]를 문학작품으로 내놓은 바 있다.

복음서가 ‘전기’ 장르와 비슷한 면이 많다고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이 장르를 기초로 독특하게 발전시켰다는 의견 또한 높다. 즉 복음서는 저자가 드러나있지 않고, 주인공 못지않게 하느님을 강조하는 신학적 경향이 뚜렷하며, 종말에 관한 관심이 두드러지고, 유다적 성격이 짙으며, 주인공의 죽음이 수치스럽고, 이야기의 끝이 매우 독특하며, 단순한 교훈 제시가 아니라 교회의 경전으로 기능했다는 점에서 남다르다. 따라서 복음서를 별개의 장르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이다.

마르코 복음서는 오랫동안 전례나 성경 인용에서 도외시되었지만, 19세기의 성경 비평을 통해 재발견되었다. 오늘날 마르코 복음서는 서사 형태로 기록된 최초의 복음서로 인정받고 있다. 아마도 마르코는 구약성경이나 그리스도교의 풍부한 전승을 바탕으로, 이미 묶인 여러 전승 단위에다 개별이야기들을 연결하여 독특한 예수 전기 형태의 완결된 이야기책을 서술한 것이다. 마르코 복음서는 1969년 이래 교회 전례(나해)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복음서 연구에서도 관심을 많이 받고 있다

4. 마르코 복음서와 구연

오늘날 고대 사회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그 사회의 구술문화가 크게 대두되었다. 예컨대, 1세기의 사회는 문학작품이 활발히 생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와 같은 문자문화가 아니라, 구술문화가 지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책도 현대처럼 독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크게 소리 내어 읽거나 구연(口演, oral performance)하기 위해 저술되었다. 1세기 팔레스티나에서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식자층은 대략 인구의 3~5%, 로마시의 경우에도 20%가 되지 않았다고 추정한다.

초대 그리스도교가 주로 사회의 중하층에서 신도를 확보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1코린 1,26 참조), 전례에서도 큰 소리로 낭독되거나 구연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마르코 복음서의 특성도 달리 이해하게 되었다. 이제까지 복음서 가운데 마르코 복음서의 문제가 가장 거칠고 그리스어 활용수준도 가장 낮다고 평가되었다. 하지만 마르코는 구술문화권에서 청중에게 다가가기 위해 입말에 가까운 통속어를 사용하였으며, 교육 수준과 관계없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투박하게 서술하였다고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또 마르코가 자주 쓰는 문학기법도 구연의 효과를 높이려는 전략으로 새롭게 인식하였다

5. 마르코 복음서의 문학적 구성과 기교

1) 최초의 예수 이야기책

마르코는 이러한 자기 구상을 담기 위해 어떻게 했는가? 그는 먼저 예수에 관한 다양한 전승을 수집했을 것이다. 그것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알리는 데 적합하고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의미있는 신앙의 메시지를 전하기 때문에 계속 남아 전해졌을 것이다. 그 가운데 토막 말씀(예수의 짧은 말씀), 비유, 논쟁, 치유와 기적 이야기, 수난 사화 등이 있었을 것이다. 사실 예수 사건이 발생한 지 한 세대가 흐르는 동안, 각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저마다 전해받은 단편적인 예수 전승을 간직하고 있었고, 그런 전승이 떠돌아다니는 선교사들을 통해 여러 교회에 전해지면서 서로 결합되어 전승 덩어리가 되었을 것이다. 대부분 구두전승이었겠지만, 곧 닥치리라고 믿었던 종말에 대한 기대가 사라져 가고 전승들에 대한 윤색이 우려되면서 점차 기록되기 시작한 문헌도 일부 있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마르코는 이러한 여러 전승을 모아 단순히 편집한 것이 아니라, 이를 자신의 신학적 의도에 맞게 새롭게 구성하고 재해석한 독창적 저술가였다. 그는 역사적 사건으로 전체 틀을 짜서 전승의 큰 흐름을 잡고, 큰 단락 사이에서 연결 어구(이른바‘요악문’)을 넣고, 여러 단편 선승을 엮어 통합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설명구를 넣어 하나의 서사(narrative, 의미있는 일련의 사건을 시간 경과에 따라 기술하되 ‘발단-전개-절정-결말’을 갖추고 변화와 진행의 인과 관계까지 서술한 형태, 형식적 체계를 갖춘 이야기)를 이루었다. 그러면서 그는 비슷한 내용의 전승 묶음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한데 모아(예: 13장) 연결시켰다. 가령 치유 기적과 논쟁(2,1-3,5), 비유모음(4,1-34), 기적이야기(4,35-5,43), 예루살렘 성전 논쟁(11,27-12,34) 등이다. 이로써 예수의 가르침이 한층 분명해지고, 갈등 또한 여실히 드러나게 된다.

마르코 복음서의 가장 큰 공헌은 단편으로 전해지던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을 통합하여 서사(이야기) 형태로 전체 면모를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이로써 예수 이야기가 계속 풍성하게 만들어질 수 있는 기초가 놓였고, 예수의 신원과 가르침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며, 기억과 보존과 전달이 훨씬 용이해졌다. 이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곧이어 등장한 마태오 복음서와 루카 복음서로 입증된다(마르코 복음서로 인해 ‘복음서’의 성격이 예수에 관한 특정 본문을 가리키는 말로 확정되었다).

2) 구술문화를 반영한 문학기법

앞에서 썼듯이, 구술문화가 압도적이던 당시 교회에서 마르코는 복음서를 ‘독서용’ 책이 아니라 가정교회의 전례모임에서 공동체에게 들려주려고 크게 ‘소리내어 읽거나’ 구연하는 책으로 서술하였던 것 같다(동작, 침묵, 인상적 둘러봄 등 활용). 그래서 마르코 복음서에는 듣는 사람들이 좀 더 잘 알아듣고 오래 기억하도록 구술문화의 기법을 많이 활용하였다.

우선 이야기를 매우 생생하고 자세하게 서술하였으며, 선명한 이미지의 언어를 많이 사용하였다. 특히 예수께서 연민을 느끼고 화를 내며 놀라워하셨다는 식의 강한 감정 표현을 그대로 드러내어 그분의 인간적 면모를 생생하게 나타내었다(1,41.43; 6,6; 8,12; 10,14.21 참조: 마태오와 루카는 이를 생략하거나 부드럽게 바꾸었다). 또 문장을 시작할 때 접속사 ‘그리고/ 그래서 (kai)’fh 시작하고 (대략 88개 단락 중 80개), ‘곧바로(euthys)’ (마르코 42번: 마태오 7번, 루카 1번)라는 부사를 자주 써서 이야기를 빠르게 진행시켰으며, 예수께서 매우 부지런하게 움직이고 계신다고 묘사한다.

일반적으로 서사는 과거 사건을 토대로 진행하기 때문에 과거시제를 사용한다. 그러나 마르코는 곳곳에서 동사를 현재형으로 사용하여(151번이나) 듣는 사람들의 주의를 끌고 생생한 현실감을 주어, 과거 사건이 아닌 현재 이야기로 알아듣고 응답하도록 이끈다(이런 특성이 번역문에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또 ‘복음’(1,1.14-15; 8,35; 10,29; 13,10)이나 ‘권한’(1,22.27; 2,10; 3,15; 6,7; 11,28.29.33; 13,34) 같은 주요 핵심어와 주요 메시지를 담은 구절(2,9ㄴ.11ㄱ; 3,14.16; 5,29.34; 8,17.21; 14,6)을 반복하여 이야기를 이끄는 동시에 각인시킨다. 마르코의 독특한 기술방식으로 두드러진 예는 ‘끼워 넣기’(일명 ‘샌드위치’) 기법이다. 그는 두 가지 이야기를 연결시킬 때, 순서대로 하기보다 한 이야기의 중간에 다른 이야기를 끼워 넣는다. 그럼으로써 두 이야기가 대조되면서 서로를 풀이하고 긴장과 극적 효과를 한층 높인다. ‘야이로의 딸 치유 이야기’(5,22-24.35-43 참조) 중에 ‘하혈하는 부인 이야기’(5,25-34 참조)를 끼워 넣은 것 등 일곱 군데에 쓰였다(3,20-35; 6,7-32; 11,12-25; 14,1-9.10-25.53-72).

마르코는 이야기를 구성할 때 세 차례 반복하여 긴장을 고조시키며 강조하는 점층법(예수의 수난예고와 베드로의 부인 등), 교차대구법(가나다나‘가’), 비슷한 사건으로 앞뒤 단락의 틀 짜기(8,22-26과 10,46-52의 ‘맹인 치유 이야기’), 이야기를 시간 순서로 진행하다가 기억을 돕고 연관성을 보이기 위하여 과거 사건으로 돌아가거나(6,16-29; 비교 1,14) 미래 사건을 예시한다(예: 2,20; 3,6; 8,31 등의 예수 수난 부활). 그래서 이야기는 직선으로 나아가지 않고 지그재그로 움직이는데, 마르코는 특히 구약성경의 모티프를 자주 반영한다.

3) 마르코 복음서의 전체 흐름

마르코 복음서는 전체가 완결된 구조를 갖춘 하나의 통일된 서사이다. 마르코 복음서의 전개 축은 예수의 복음 선포와 행위를 중심으로 한 갈등이다. 이 갈등은 두 차원에서 전개되는데, 하나는 예수와 유다 지도자들의 외적 갈등이고, 또 하나는 예수와 열 두 제자의 내적 갈등이다. 이 갈등들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절정을 맞는데, 예수의 부활로 반전된 채 갑자기 끝난다. 결국 갈등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고, 해결의 몫은 독자에게 남겨진다.

또 예수의 권위에 대한 태도를 중심으로 이야기의 흐름을 살피면, 처음에는 예수의 정체와(1,1-15 참조) 그분의 권위가 말씀과 행동으로 드러난다(1,16-3,5 참조).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그 분을 이해하지 못한 채 배척하며(3,7-6,6ㄱ 참조), 제자들까지도 이해하지 못한다(6,6ㄴ-8,26 참조).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의 신원이 다시 거론되고 그분이 겪을 일이 예고된다(8,27-10,52 참조). 다시금 그분의 권위는 도전받고 배척되며(11,1-13,37 참조), 그 결과로 십자가 처형을 받으나 끝내 부활하신다(14,1-16,8 참조). 전체의 무게 중심은 구원의 메시지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고 실현되는 후반부에 놓여있다.

한편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땅을 살펴보면, 갈릴래아(1,14-7,23 참조), 갈릴래아 건너편 이방인의 땅(7,24-8,26 참조),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8,27-10,5 참조), 예루살렘(11,1-16,8 참조)이 차례로 이어진다(마르코 복음서에서 장소 변화는 대략 40번 정도다). 갈릴래아와 예루살렘은 각각 유다교의 변두리와 중심지,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쪽과 배척하는 쪽, 계시와 구원의 은총이 드러나는 터와 구원자를 죽이는 터, 미래로 열린 장소와 과거에 굳어진 장소의 양쪽 세력을 상징한다.

4) 마르코 복음서의 언어

마르코가 사용한 언어는 헬레니즘 시대 이후 일반 사람들이 흔히 쓴 코이네(koine, 통용되는’이란 뜻) 그리스어이다. 이것은 아테네의 아티카 방언이 좀 더 단순하게 발달된 언어로 비문어체 非文語體이다(유식한 이들이 쓴 문어체의 고전 그리스어와 다름). 예수 시대에 도시 는 물론 촌락에서도 거래하거나 경제 행위를 할 때 이 언어를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마르코의 그리스어 사용은 별로 세련되지 않고 빈약하다. 그가 라틴어(주로 군사, 사법, 경제 분야)와 셈어 관용어를 섞어 사용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마르코 복음서는 그리스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고 헬리니즘 문화와 셈계 문화가 혼합된 복합 문화권에서 나온 것으로 여겨진다. 이 복음서에서 인용한 구약성경은 칠십인역으로, 특히 예언자 전승이 많이 이용되었다.

1세기에 글은 파피루스에 빈칸이나 띄어쓰기 없이 빽빽하게 쓰였다. 당시 파피루스 두루마리 1개의 값은 대략 4드라크마(숙련 노동자의 하루 임금)인데, 마르코 복음서를 쓰려면 대략 두루마리 한 개 반이 필요했을 것이다(바오로 사도가 로마서를 쓰는 데 필요한 파피루스 두루마리 한 개를 사려면 적어도 나흘을 일해야 했다). 당시 700줄 짜리 잘 쓴 사본 하나의 값이 5 데나리온(덜 세련된 것은 1.5-2 데나리온)인데, 마르코 복음서는 대략 1400줄 정도였다.

6. 오늘 마르코 복음서를 읽는 까닭은?

고대에 입으로 전하던 전승을 글로 기록한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변화이다. 글은 남다른 권위를 지닌다. 구전은 당시 상황, 말하는 이의 억양과 자세, 듣는 이의 처지 등 숱한 변수에 따라 창조적으로 덧붙여지거나 변질될 가능성을 언제나 안고 있다. 그러나 일단 글로 기록되면, 전승은 고정되어 더 이상 주변의 영향을 받지 않는 확고 불변한 본문이 된다.

마르코 공동체가 복음 ‘이야기’가 아니라 복음‘서’를 필요로 했다는 것은 그리스도교가 안팎으로 혼란했던 그 시대에 좀 더 흔들리지 않는 삶의 기준을 복음에서 찾고자 했기 때문이다. 고정되어 표준화된 복음 본문을 공유함으로써 하나의 믿음으로 일치하고, 의사소통이 빈약했던 흩어진 그리스도인 사이의 신앙고백도 일치할 수 있으며, 삶의 준거점 역시 확실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전략이 시대 상황에 유효하고 적절했음은 뒤이어 다른 복음서들이 쏟아져 나온 사실로 입증된다. 그 점에서도 성령의 이끄심은 역력해 보인다.

마르코 복음서에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물으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8,29). 이천년 동안 배우고 익혀 왔건만, 우리는 이 물음 앞에서 여전히 막연해진다. 그분은 머리로, 입으로 대답하지 말고 삶으로 고백하라 이르신다.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13,37). 그 분을 알고 나를 알기 위하여, 생명의 길을 찾기 위하여 우리는 다시 복음서를 읽는다. 지금 그 안에서 들려오는 말씀을 듣고 눈을 떠 “예수님을 따라”(10,52) 가기 위하여.

¶ “복음서를 읽는 것은 시를 읽는 것과 같다. 이것은 상상적 체험이다. 연속된 사건과 말씀들이 결합하여 우리 마음 속에 하나의 복합적이며 강력한 상징, 의미의 패턴을 창안하여 제시한다”(헬렌 가드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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